'대책도 없는' 증권사로 흘러가는 코로나 지원금
입력 2020.04.23 07:00|수정 2020.04.24 10:17
    한은, 사상 처음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출 허용
    증권사, 금융시장 안정화 명분으로 지원받는데
    직격탄 맞은 기업들은 고강도 자구안 내놔야

    증권사 유동성 위기 '구조적 문제', 언제든 부상
    미국에선 대규모 장기 회사채 발행으로 대응
    • 한국은행이 다음달부터 증권사들에 대한 직접 대출을 실시한다. 증권사가 보유한 우량 회사채(AA- 이상)를 담보로 최장 6개월 이내로 대출해주는 것이 골자다. 한국은행이 회사채를 담보로 증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출을 허용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코로나 사태 확산으로 3개월가량 일상은 올스톱됐고 실물 경제가 침체에 빠졌다. 돈이 돌지 않으면서 기업들의 자금줄이 마르고 있고 금융시장의 불확실성도 한층 높아졌다. 초대형 투자은행(IB)를 위시한 대형 증권사들이 "우리를 먼저 도와달라"고 한다. 정부는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증권금융을 통한 유동성 제공, 채권시장안정펀드 등 정책을 통해 불확실성이 높아진 단기자금 안정화에 주력하겠다고 밝혔지만 효과가 눈에 띄진 않는다.

      한국은행이 증권사 직접 지원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증권사들의 요구 목소리는 오히려 커졌다. 단기 금융시장 안정을 목적으로 한다면 담보 대상을 우량 증권사들이 발행하는 기업어음(CP), 프로젝트파이낸싱 자산유동화기업어음(PF-ABCP)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증권사들의 단기 유동성 문제가 과연 '코로나'라는 일회성 이벤트 때문일까,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로 반복될 수 있는 문제일까. 증권업계를 제외한 시장 참여자들은 후자에 손을 든다. 지원 대상에 그칠 게 아니라 대형증권사 스스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는데 그럴 의지도, 생각도 없다는 의미다.

    •  

    • 현재 증권사들의 유동성 위기 주요 원인으로는 ▲ELS 증거금 납입에 따른 유동성 리스크 ▲유동화증권 차환 관련 유동성 리스크 등 크게 두가지가 꼽힌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ELS의 주요 기초자산인 해외 지수가 빠르게 하락하면서 증거금 납입에 따른 유동성 위험이 불거졌다. 단기간 내 밀려든 증거금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증권사가 CP 발행을 늘리고 환금성이 높은 채권을 대규모 매도했다. 이 과정에서 단기 금융시장 교란이 발생했다.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증권사가 보증한 유동화증권의 롤오버 위험도 커졌다. 4월에만 13조7000억원의 유동화증권 만기가 도래하고 2분기 중 만기도래액은 30조원에 육박한다.

      단기 유동성 문제 원인 모두 코로나 이전부터 증권사들이 대대적으로 키워왔던 사업들이다. 코로나는 트리거 중 하나였고 증권사들은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문제는 정부가 쓸 수 있는 재원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단기 금융시장 안정화라는 명분으로 증권사들이 돈을 빨아들이자 정작 실물 경제 침체 직격탄을 맞은 중소·중견·비우량기업들에 대한 즉각적인 지원은 어려워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투기등급 회사채까지 유동성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방침과 대조적이다.

      초대형 IB가 구원자는커녕 골칫덩어리가 된 원인은 취약한 자금조달 구조에 있다.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출범 이후 투자자산의 평균 잔존만기는 늘어났지만 증권사들의 차입부채는 여전히 단기성 자금에 의존하고 있다. 자산과 부채 만기에서 미스매치가 발생하고 있고, 초대형 IB의 발행어음 사업이 문제를 심화시켰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2019년말 증권사의 차입부채 구성은 대고객부채 78.9%, 단기성 차입부채 16.5%, 장기성 차입부채 4.6%로 구성돼 있다. 대고객부채 또한 만기가 1년 이내임을 감안하면 단기성 차입금 비중이 절대적이다. 그 중에서도 비유동성자산 투자 비중이 계속 커지고 있는 종합금융투자사업자들은 단기성 차입금 비중이 더 늘어났다. 장기성차입금이 2015년 3.1%에서 2019년 5.1%로 늘어나는 동안 단기성 차입금은 8.5%에서 16.6%까지 증가했다. 앞으로 초대형IB 요건을 갖춘 종합금융투자사업자가 발행어음 사업을 개시하면 이들의 단기성 차입비중은 더 늘어나 자산 구성 변화와 조달 만기의 구성의 역행이 심해질 것이다.

      글로벌 IB와 큰 차이를 보인다. 국내 증권사 부채구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결과 골드만삭스그룹은 2019년 기준 대고객부채 50.5%, 단기성 차입금 9.4%, 장기성 차입금 40.1%로 장기성 차입금 비중이 매우 높게 나왔다. 특히 최대 50년물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산과 부채의 듀레이션 균형에 신경을 썼다는 평가다. 노무라홀딩스는 대고객부채가 74%로 국내 증권사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단기성 차입금은 2.5%에 불과했다. 장기성 차입금은 평균 잔존만기가 6년으로 구성돼 있어 비유동성자산의 투자에도 대응가능하다. 일본계 증권사인데 회사채 중 역외 조달 비중이 26%에 달하는 것도 눈에 띈다.

      반면 국내 대형사가 발행한 장기성 차입금의 평균 잔존만기는 3.25년에 불과하다. 메리츠증권의 신종자본증권을 제외하면 2.76년으로 더 짧아진다. 자기자본 규모가 가장 큰 미래에셋대우는 7년물, 10년물 등 장기채를 발행하긴 했지만 전체 차입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 시장에선 이번 기회에 초대형 IB들의 자금조달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증권사들의 단기 유동성 문제는 코로나 이후에도 언제든지 부상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형증권사들의 고위험 익스포져를 보면 위험투자 확대 기조가 뚜렷하다. 2015년말 58조원 규모였던 고위험 익스포져(주식, 집합투자증권, 대출금, 우발부채, 자체헤지 ELS 및 DLS)는 2019년말 128조원으로 2배 이상 증가했고 자본 대비 익스포져 비중도 315%로 높아졌다. 신용위험은 과거보다 커졌고 그만큼 시장 변동에 대한 위험노출도도 높아졌다.

      그 사이 증권사들의 조달구조는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단기성 차입금 위주이고 이는 우발채무에 대한 유동성 대응능력을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익이 높아진만큼 리스크도 커졌는데 이에 대한 대비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신용평가업계에선 대형증권사들이 조달 구조의 안정성을 위해 장기성 차입금, 외화차입금, 외화 크레딧라인을 확보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미 늦었다. 초대형 IB 자격 요건에 단순히 4조원이라는 자기자본 규모뿐 아니라 안정적인 자금 조달 구조도 넣었어야 한다는 지적이 더 와닿는다.

      초대형 IB들은 모두 AA급 신용등급을 보유하고 있다. 정부 지원에만 기댈 게 아니라 대규모 회사채를 발행해 단기차입금 상환, 단기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고 차입 구조 다변화를 꾀할 수 있다. 우량기업의 차입금 상환 목적인만큼 채안펀드 편입 요건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형증권사들이 나설 이유가 없다. 회사채 발행은 결국 조달비용 증가를 의미한다. 특히 회사채 시장 경색 이후 AA급 회사채가 발행되려면 평소보다 꽤 높은 스프레드를 감수해야 한다. 돈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증권사 입장에선 1bp도 아깝다.

      이 때문에 증권사 지원을 두고 '특혜'라는 의견마저 나온다. 일반 기업들은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계열사나 자산을 매각하는 등 자구안을 내놓아야 한다. 증권사들은 자구안 마련 노력은커녕 조금의 조달 비용 증가도 원치 않고 지원은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코로나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업종들이 많고 일례로 자금 지원을 받은 두산그룹은 고강도 자구안을 내놓거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대한항공은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꺼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금융시장 경색 완화라는 대승적 의미는 이해하지만 안정화 이후에라도 금융시장 경색 원인을 제공한 증권사들 역시 합당하는 수준의 자구안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대형 IB들은 처음으로 파산을 경험했다. 원인은 결국 IB들의 과도한 신용 거래와 리스크 관리 소홀, 즉 모럴헤저드였다. 그 와중에도 ‘대마불사’는 존재했고 존재감은 더 커졌다. 국내 초대형 IB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목도한 이후 출범했다. 금융위기 때 어려움을 겪은 글로벌 IB들을 반면교사 삼아 커진 권한 만큼이나 리스크 관리, 안전판 구축에 신경을 쓸 줄 알았는데 현재 국내 초대형 IB들의 상황은 위기에 취약함을 두드러지게 했다.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국내 대형 증권사들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초대형 IB 출범 이전부터 유동화 익스포져, ELS로의 자금 쏠림 현상, 급증하는 우발채무와 파생결합증권에 대한 우려를 보내왔다. 현 시점에선 신용등급 강등도 검토하고 있다. 여러 객관적 지표상 등급이 조정돼야 한다는 안팎의 의견도 과거에 비해 커졌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은 것도 현실이다.

      금융당국 입장에선 증권사 신용등급 강등에 따른 금융시장 경색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앞서 제시한 정책들의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금융당국의 무언의 압박은 신평사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데 제약이 될 수 있다. 증권사들 입장에선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증권업계 전체적으로 등급 인플레이션이 심각한데 특정 증권사의 등급만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즉 증권업계 전체적인 다운그레이드가 동반돼야 하는데 이 역시 신평사에 큰 부담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초대형 IB에 대한 신용도 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대마불사' 분위기가 굳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는 차후에 또 다른 금융위기로 올 수 있고 그 때는 위기감이 지금보다 더 클 것이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JP모건이 만기 5년, 10년, 20년, 30년으로 100억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그것도 유통가보다 40~50bp 높은 금리로 말이다. 1분기 어닝시즌에서 경기 침체 분위기를 읽고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는 모양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IB들은 위기에 살아남기 위해선 어떤 비용이라도 지불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