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반등 기대감 '착각'
유동성 공급이 만든 거품
기업가치 평가 불가능한데
기업들 지원 요구 '큰 소리'
자본시장 투자 선순환 막아
인수합병·사모펀드 '주춤'
시장 주도 구조조정 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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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회생 가능성이 없으면 시장 원리에 따라 퇴출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마땅찮은 '이유'로 정부나 채권단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연명한다. 좀비기업(Zombie Company)의 시작이다. 좀비기업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고 논란거리를 만들어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시작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쳐오면서 누가 지원을 받고 받지 못했는지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코로나 팬데믹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전과는 양상이 크게 다르다. 기업의 정상, 비정상 여부를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기업이 코로나 때문에 어려워졌는지, 아니면 이전에 있었던 문제가 증폭된 것인지 수치화할 수가 없다. 글로벌 각 국가들은 그 어떤 재정정책을 써서라도 경기 침체를 막겠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기업들이 그 수혜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저신용 기업들의 회사채 매입에 나서겠다고 발표하자 신용 리스크 확산은 주춤해졌다. 이 효과를 먼발치에서 확인한 우리 정부와 한국은행도 다양한 유동성 공급정책을 내놨다. 저신용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단기사채 등을 매입하는 특수목적기구(SPV) 운용도 발표한 상황이다. 시장은 안정을 찾았고 주가는 코로나 이전으로 회복됐다.
좀비기업에 대한 우려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유례없는 주가 반등이 기업들의 펀더멘털에 대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코로나만 종식되면 기업들 역시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그런데 현재의 주가 상승은 실물경제 회복과 기업가치 개선을 동반한 것이 아닌, 유동성 공급이 만들어낸 거품에 가깝다. 공매도 금지는 주식 시장 붕괴를 막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한 기업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을 없앤 것이기도 하다.
지원을 요구하는 기업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다. 기업의 상황 악화 원인을 모두 ‘코로나’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항공사, 여행사, 면세점 등 직격탄을 받은 업종 기업들은 물론 각 산업군의 기존 좀비기업들도 해당된다. '버티면 된다'는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총선을 치른 정치권은 일찌감치 다음 대선으로 눈을 돌렸고 경기 부양에 방점을 찍었다.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구조조정에는 큰 관심이 없고 돈을 풀 생각만 한다. 기업들은 '표'에 가장 중요한 고용유지를 앞세워 지원을 요구한다. 11월에 대선을 앞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가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큰 정부'와 '큰 중앙은행'을 꼽는다. 이번 지원 과정에서도 보면 과거 채권단의 중심이었던 시중은행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중심에 있다. 현 시점에서 막대한 유동성 공급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늘어난 정부의 빚 부담은 더욱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보이고 좀비기업이 늘어날 개연성도 커졌다. 한 번의 정부 지원으로 끝날지, 앞으로 계속 발목을 잡을지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 이전의 상황은 이미 좋지 않았다. 한국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매출액 데이터가 있는 상장기업 685곳을 조사한 결과 지난해에 기업 20.9%의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작았다. 한국은행도 2019년 국내 기업 3곳 중 1곳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애초에 국내에서 좀비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코로나는 기존 좀비기업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물론 내성이 강한 새로운 좀비기업을 양산시킬 수 있다. 과거 경기부양 때와는 달리 부채 축소와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을 수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부채 확대와 좀비기업 양산은 자본시장 내 투자 선순환을 가로막는다. 하이투자증권은 최근 리포트에서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 부채 축소→공급부족→기업투자 확대→경제 성장 및 기업매출 확대→기업 부채 축소' 같은 레버리징 사이클은 사라지고 '성장 둔화 혹은 위기 발생→기업부채 증가→기업투자 위축→구조조정 지연 및 공급과잉 지속→경제성장 및 기업매출 둔화→기업부채 증가'와 같은 디레버리징 사이클의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수합병(M&A)시장은 조용하다. 지금처럼 기업가치 재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주가가 높아진 상황에선 매각 측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고 인수 측은 그 가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이자 수익률이 가장 중요한 사모펀드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의 유동성 공급 과잉이 시장 주도의 구조조정 가능성을 더 줄인 셈이다.
금융권에선 코로나 직전에 국내 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기대했다. 전통적인 수출품목들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중이었고 새로운 성장동력에 집중 투자를 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선택과 집중'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코로나는 전방위적 유동성 공급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원화는 달러 같은 기축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부채 급증은 언젠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고 구조조정의 지연은 성장 궤도에서 다시 벗어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내성이 생긴 좀비기업의 양산이 앞으로 빈번한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코로나 같은 대형 악재뿐만 아니라 이벤트 성격이 강한 작은 악재에도 기업들은 도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장 2분기 실적 발표, 신용등급 정기 평가, 공매도 재개 등이 기다리고 있다. 기업의 탄생과 도태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못한다면 좀비기업이 정상기업을 잠식하는 상황을 지켜만 봐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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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6월 17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