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공공부문에 유동성 집중 유도
'큰 정부'의 비전문성·비효율성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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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코로나' 한 단어로 요약된다.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됐던 세계는 일순간 물리적 단절을 경험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고 시장도, 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공지능(AI), 바이오, 친환경을 꺼내지 않는 기업은 당장 도태될 위기에 처했다. ‘구시대’ 낙인이 찍힌 산업은 구조조정으로 혼란스럽다. 특정 산업, 특정 시장을 향한 유동성 쏠림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문제가 더해진다.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는 경쟁적으로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 위기 상황을 타개한다는 명분으로 '큰 정부'가 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한국판 뉴딜정책을 기치로 내건 정부는 구조조정과 공공부문 투자의 주체가 돼 산업 혁신의 구체적 결과를 예단하고 있다. "혁신의 주체는 기업과 시장"이라는 말은 '국가'라는 대의(大義) 앞에서 무기력해졌다. 사실상 대선 국면에 접어들 내년엔 정치가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올해 자본시장은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이끌었다. 그동안 투자자들과의 눈높이 차로 지지부진했던 비우량 그룹의 재무구조 개선 작업은 산업은행 주도로 일시에 처리되고 있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처리한다는 시그널이 계속 나오고 있다.
원자력 발전에 한 축을 맡아왔던 두산중공업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채권단 주도로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에 발맞춘 친환경 에너지 기업이 됐다. 뒷말은 많다. 원전 경제성 평가와 관련한 검찰 조사는 정치적 이슈가 됐다. 두산인프라코어 매각은 과거 대우조선해양 매각 때처럼 산업은행이 현대중공업을 지정해 매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양대 국적항공사 통합 과정도 시끄럽다. 산업은행의 한진칼 신주 인수를 두고 법원이 손을 들어주면서 인수 작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인력 구조조정, 재벌 특혜, 주주자본주의 침해 등 논란은 여전하다. 이 딜(Deal)을 반대하면 국가 경쟁력이라는 대의를 저버리는 것처럼 됐고, 산업은행이 통합LCC 카드를 꺼내자 공교롭게도 가덕도 신공항과 맞물려 정치적 해석을 낳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만 해도 산업은행은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을 시장 주도로 바꾸겠다고 공언했지만 어느새 국가 산업 구조조정의 첨병이 됐고 누구보다 시장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년 자본시장에선 정부의 지배력이 더 커질 가능성이 짙다. 시장 전체를 관통할 키워드 '뉴딜(New Deal)'을 통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마중물을 넣고 금융기관과 기업, 시장의 유동성 투입을 기대하고 있다.
한국판 뉴딜 예산은 올해 1조2865억원에서 내년도 2조3685억원으로 두배 가까이 늘었다. 공공건축물 그린리모델링, 공공임대 그린리모델링, 사회간접자본(SOC) 스마트화, 물류인프라 지원 예산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제4차 혁신성장정책금융협의회에서 향후 5년간 총 100조원 규모의 디지털 및 그린 뉴딜분야 기업에 대한 대출, 투자, 보증지원 계획도 내놨다. 내년 5100억원의 재정을 투입해 조성하는 정책형 뉴딜펀드의 효과적 투자를 위해 40개 분야, 200개 품목을 투자대상으로 하는 투자 가이드라인도 확정했다. 산업은행은 여기서도 정책형 뉴딜펀드의 운용을 맡고 있는 동시에 스타트업 육성이라는 과제를 맡았다.
최근 산업은행은 스타트업 보육프로그램 KDB넥스트원(NextONE) 2기 모집을 하면서 '한국판 뉴딜' 관련 기업에 가산점을 주기로 했다. 앞서 언급된 뉴딜투자 가이드라인에 속한 분야와 품목이 대상이다. 이는 정부가 사실상 육성 스타트업을 정해놓고 투자자들에겐 정해놓은 기업들에 투자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투자 가이드라인에 빠진 산업과 기업은 자금 통로가 더 좁아진 셈이다. 민간의 위험자본 투자와 결과에 따라 투자 회수 여부가 결정되는 스타트업의 본래 취지는 정부가 그린 K뉴딜 청사진에선 사라졌다.
결국 구산업의 구조조정과 신산업의 투자 주체인 산업은행의 영향력, 즉 자본시장에서 정부의 영향력은 더 커질 전망이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목표를 맞춰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제5차 혁신성장전략회의 겸 제43차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BIG3산업 육성대책' 추진을 발표했다.
시스템반도체는 파운드리분야 세계 1위 도약기반 마련 목표하에 2022년까지 파운드리 글로벌 시장점유율 18%, 팹리스 2%를 달성하고 2025년까지 각각 25%, 5% 달성을 목표로 제시했다. 미래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수소차 생산국가 도약 목표하에 2022년까지 미래차 38만대 보급과 수출비중 10%를 달성하고 2025년까지 각각 133만대, 20%로 목표로 잡았다. 바이오헬스 경우 K-바이오 차세대 성장동력화 목표(5대 수출산업 육성) 하에 2022년까지 수출액 200억달러, 세계시장 점유율 3%를 달성하고 2025년까지 각각 300억달러, 4.2%를 목표로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이 해당된다.
투자은행(IB) 관계자는 "경제부총리가 마치 민간 기업 대표처럼 특정 산업의 점유율 목표치를 제시하는 것은 과거 경제개발계획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며 "산업 변동성, 기술 진화는 정부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데 실제로 사업을 하는 기업들은 장담할 수 없는 정부 목표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데 시간과 돈을 써야 할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경영권 승계, 상속, 재판 등 미해결 과제를 떠안고 있는 대기업들이 표면적으로는 재벌개혁을 외치는 현 정부의 뉴딜정책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와 KT 등 준 공기업들의 역할(?)도 예상된다. 철강, 통신 등 이들 기업의 주력 사업은 스마트시티, 스마트 팩토리 인프라 구축에 필수적이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와 KT는 역대 정부의 정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만큼 정치적 구설수에도 많이 오르내린다. 포스코는 최정우 회장 연임이, KT는 중간 지주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편 가능성이 주요 이슈다. 정치적 간섭은 두 기업 기업가치 제고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지금처럼 정부의 힘이 커지게 될 때는 그 간섭도 심해질 수밖에 없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사실상 실패라고 평가한 바 있다. 미국이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통해 단기간 경기가 회복되긴 했지만 금세 동력을 상실했고 2차 공황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공공 부문의 일자리 창출은 민간 부분의 일자리 파괴로 상쇄됐고, 정부 주도의 국가산업재건법은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지적한다.
'큰 정부'의 가장 큰 리스크는 리스크 관리가 없다는 점이다. 민간 기업이었으면 내부적으로 제지됐을 사안들도 정부엔 큰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예산을 늘리거나 시중의 넘치는 유동성을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지방선거, 대선 등 정치의 계절로 접어들게 되면 선심성 공공투자 확대엔 여야가 없다.
다른 선진국들도 단기적으로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확산세가 거침없는 미국은 더블딥(이중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꺼내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재정 정책을 통해 민간 투자 확대를 유도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불가피하게 내년 자본시장은 국가가 기획하고 공공부문이 주연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기업들의 효율화 작업은 이어질테고, 노동 문제는 더 시끄러워지면서 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 정부의 바람대로 부동산 시장이 안정을 찾을지는 미지수고, 돈을 좇아 뉴딜발(發) 펀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기미를 보인다. 그만큼 국가 전체적으로 감내해야 할 리스크는 커진다. 자본시장의 핵심은 '신뢰'인데 국가가 주도하고 정치의 힘이 더 세질 내년엔 이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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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12월 15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