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투자처 물색부터 어려움 겪어
"조급한 발행, 냉정한 평가 뒤따를 것"
-
연초부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채권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기업들이 ‘너도나도’ 발행에 나서면서 전후 관리에 대한 불안감도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여전히 기업들의 준비와 제도적 기반이 미흡한 만큼, 안정적인 시장 정착을 위해서 풀어가야 할 과제들도 남아있다. 발행된 ESG 채권의 실제 자금 사용처 등 사후검증이 시작되는 1~2년 후부터 기업들의 ‘진짜 성적’이 갈릴 전망이다.
-
지금까지 국내 ESG 채권 발행은 공사채가 주를 이뤘다. 지난해에는 88%가 공사채, 일반 기업의 회사채 비중은 1%에 불과했다. 올해 ‘ESG 바람’을 타고 분위기가 급변했다. 1월 국내 ESG 채권 발행 중 30%를 회사채가 차지했다. 1~2월에만 ESG 회사채 발행 규모가 4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불과 2019년·2020년 각각 연간 ESG 회사채 발행은 8000억~9000억원에 그쳤다.
폭발적인 성장 속도에 비해 기업들의 준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신용평가사 등 ESG 채권 인증을 담당하는 기관에선 국내 기업들의 준비도가 낮다고 이구동성으로 평가한다. ESG 채권의 개념과 준비 과정 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익숙하지 않은데 우선적으로 발행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평이다. 일부 대기업 계열사들은 ‘일단 그룹 기조에 맞추려고’ ESG 채권 발행에 나서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실제로 국내 기업 대다수가 ESG 채권 성격에 맞는 투자 대상을 찾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ESG 채권 발행을 위해서는 조달된 자금이 쓰일 적합한 투자처 혹은 사업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증 과정이 까다롭다보니 일부 기업들은 산업 특성상 환경 및 사회적 요건과 관련된 투자 대상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40개 이상의 기업들이 ESG 채권 발행 문의를 해오고 있지만 실제 적절한 프로젝트를 찾아서 진행하는 곳은 10여개에 불과하다”며 “최근 ESG를 붙여야 투자하겠다고 하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다 보니 일부 기업들은 어떻게든 발행을 하려고 어렵게 프로젝트를 찾아서 애써 발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ESG 채권이 또 다른 양극화를 불러온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양한 산업을 영위해 인증 대상을 찾기 쉬운 대기업 중심으로 발행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지주사처럼 사업 영역이 모호한 계열사도 투자 차원에서 ‘ESG 이름표’를 붙이기 비교적 쉽다. 예로 SK㈜는 이달 발행하는 3000억원 규모의 ESG 채권 발행 금액 전액을 북미 수소 사업회사인 플러그파워 지분 일부를 취득하는 데 소요한 차입금 등의 채무를 상환하는 데 사용할 계획이다.
산업별로도 상황이 제각각이다. 철강·정유·화학 등 환경 이슈가 많은 기업들, 전기·수소차 등 친환경 사업 전환이 시급한 기업들은 관련 투자처가 많아 적극적인 발행이 가능한 반면, IT·통신·유통 등은 대상 사업을 찾기 어려운 편이다. 전자의 경우 어차피 필요한 자금에 ESG를 붙여 회사채를 찍으면 수요도 늘어나고 평판도 올라간다.
-
평판 제고 목적이 크다보니 그룹 간의 때아닌 경쟁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한다. 2018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에서 ESG 채권을 가장 많이 발행한 그룹은 SK·현대차·현대중공업·LG·롯데·GS 순이다. 최근에는 ‘국내 일반기업 중 ESG 채권 최대 규모 발행’ 타이틀을 두고 SK하이닉스(1조1022억원)와 LG화학(8200억원)이 신경전을 벌였다. LG화학 측은 SK하이닉스가 발행한 녹색채권은 해외 채권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LG화학이 역대 최대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ESG 채권 최고 등급 인증을 받고 성공적으로 발행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며 “ESG 채권이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향후에는 중견·중소기업에도 문이 열려야 하는데 인력이나 자원에서 격차가 있다보니 시장에서도 어떻게 차별적으로 해석해야할 지 숙제가 남는다”고 말했다.
향후 건강한 ESG 채권 생태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후 검증이 필수다. 신용평가사들이 ESG 채권 인증에 등급을 부여하는 목적도 향후 ‘그린워싱’(친환경 위장)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발행 당시 최고 등급을 받았어도 1년 이후 등급이 그대로 유지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충분한 준비 없이 급하게 ESG 채권을 발행한 기업들은 1년 후부터 냉정한 성적표를 받게 될 것”이라며 “만약 약속대로 자금 이행이 안된 사실이 드러나면 기업이나 그룹의 평판에 타격이 갈 것”이라고 말했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2월 19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