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금 안내는 기관들, 운용규모보다 많이 청약
외국인 몰린 크래프톤, 최상단에 받아 '손절매'
주가 상승여력 떨어지고 투자자 수익률 하락 위험
-
공모주 청약 열기가 과열되며 '수요예측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외 기관들의 기업가치 평가 잣대가 지나치게 후해졌다는 비판이다. 공모주를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한 기관들의 경쟁으로 가격 발견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상장을 위해 수요예측을 진행한 57곳(기업인수목적회사 제외) 가운데 아모센스와 에이치피오 등 2곳을 제외한 모든 기업이 희망가격 ‘최상단’ 또는 ‘상단초과’로 공모가가 결정됐다. 기업의 적정 가격을 결정하는 수요예측 제도가 기관투자자가 늘어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IPO 기업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은 400여곳에 불과했다. 올해는 1600여 곳까지 늘어났다. 사상 최대 규모 수요예측 신청이 몰린 카카오뱅크의 경우 참여 기관 수가 1667곳에 달했다. 자산운용사 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탈, 투자자문사 등 소규모 기관이 크게 늘어난 결과다.
기관은 수요예측 과정에서 청약증거금을 내지 않는다. '허수 주문' 뒤 물량을 배정받으면 일반공모 청약일에 배정량에 맞춰 입금을 진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자들이 늘어나다보니 일단 가격은 높게, 물량은 많이 신청해 최대한 배정부터 받자는 심리전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 운용사 관계자는 “카카오뱅크에 몰린 기관수요예측 규모가 2700조원인데 사실 그만큼의 돈이 어디있겠냐”며 요즘 공모주가 잘 팔리다보니 공모주 펀드를 하는 회사들은 높은 수익률을 믿고 오버슈팅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사모운용사들이 펀드 규모가 얼마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1조원 규모로 청약을 넣어도 경쟁률이 워낙 쎄서 그만큼 배정받지도 못한다”며 “때문에 수요예측 과정에서 제대로된 기업분석이 안 이뤄지고 일단 많이 불러서 많이 받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수요예측은 '전문투자자'인 국내외 기관들이 발행사가 제시한 공모희망가 밴드를 평가하고, 가장 적합한 시장 가격을 선정하는 과정이다. 물량 경쟁이 벌어지며 이 같은 가격 발견 기능은 사실상 사라지다시피한 상태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최근 공모가격이 희망밴드 ‘최상단’ 또는 ‘상단초과’로 결정된 비율은 ▲2017년 56.45% ▲2018년 51.95% ▲2019년 65.75% ▲2020년 80% ▲2021년 8월 현재 기준 94.83%로 급증하고 있다.
무게를 잡아줄 '앵커 투자자'(주축 투자자)도 사라진 지 오래다. 2018년을 전후해 국내 5대 자산운용사는 공모주 투자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이들은 주요 지수 편입 가능성이 큰 대형주 위주로만 참여한다. 공모주 펀드를 운용하거나 전담 운용인력을 두는 일도 거의 없앴다.
외국계 투자자들은 오히려 '잡음'을 더하는 존재란 평가까지 나온다. 최근 상장한 크래프톤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싱가포르투자청(GIC)이 참여했다. 크래프톤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이들이 속한 '거래실적이 있는 해외투자자'이 수요예측에 신청한 물량의 94% 이상이 '가격미제시'였고, 나머지도 공모희망가 밴드 상단이었다.
상장을 앞두고 크래프톤은 블랙록 등 장기 보유 성향이 뚜렷한 롱 펀드(long fund)가 수요예측에 참여했다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상장 후 불과 이틀간 2700억여원의 매물을 쏟아내며 주가 급락의 원인을 제공했다. 공모희망가 밴드 최상단 가격으로 주식을 받아놓곤 일주일도 채 안돼 '손절매'에 나선 것이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현재 기관수요예측 경쟁률이 1000대1을 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무임승차하는 기관들도 많다”며 “기관투자자들 안에서도 리서치 역량이 있는 기관도 있지만 인터넷에 있는 리서치 자료를 보고 그냥 참여하는 기관들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수요예측 기능 상실로 공모가가 과열되면 이는 결국 투자자의 수익률 악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공모가가 높게 결정되면 발행회사 입장에서는 기업가치를 높게 받아 좋겠지만 상장 이후 주가가 공모가만큼 오른다는 법칙도 없고 주가 상승에 제한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수요예측에서 주관사에 공모주 배정의 자율성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모주 배정과정에서 수요예측 물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기관이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는 것만으로도 주관사에 상당한 압박이 되기 때문이다. 무임승차하며 공모가액을 뻥튀기하는 기관이 아니라 적절한 시장가치를 산정하는 기관들에게 공모주를 자율적으로 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본시장연구원 이석훈 선임연구위원은 “주관사가 주도권을 갖고 오버슈팅이 아닌 가격발견 기능 능력을 갖춘 기관에게 배정해 리서치역량을 강화해 수요예측의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도 “담합이 되지 않도록 주관사 내 컴플라이언스를 갖추고 기업 가치 산정을 잘못해 상장 후 주가가 하락하는 경우 주관사의 평판이 떨어지는 등 주관사의 책임과 역할도 함께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