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기계·조선 양대 축 그림 흔들…정기선 체제 업적 만들기 미뤄질 듯
최대 부담은 산업은행…대우조선 경쟁력 하락에 플랜B 마련도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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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의 대우조선해양 M&A 승인이 장기화하며 현대중공업그룹과 산업은행의 수심도 깊어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그룹 지배구조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는데 M&A가 무산되면 핵심 축인 조선사업의 무게감이 줄어들게 된다. 정기선 부사장의 업적 쌓기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M&A 무산 시 가장 난처해지는 것은 산업은행이다. 현대중공업이야 적어도 현상유지는 가능하지만 산업은행은 손에 쥐는 것이 없다. 2년여간 불안정한 지위 속에 사업에 애를 먹던 대우조선을 다시 떠안아야 한다. 대우조선을 분할해서 팔든, 나중에 다시 새 주인을 찾든 쉽지 않을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은 지난 2019년 2월 대우조선 M&A 계약을 맺었다. 현대중공업은 같은 해 7월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해 6개국에 기업결합 심사를 신청했는데, EU의 심사는 지지부진하다. EU는 작년 6월 중간 심사 발표를 통해 컨테이너선, 해양플랜트 등 건조 시장의 경쟁 제한 우려는 해소됐다고 밝혔으나 이후 심사는 팬데믹 여파로 여러 차례 지연됐다.
하반기 들어 현대중공업과 EU가 입장을 주고 받으며 심사 절차가 진행 중인데 분위기는 썩 밝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LNG운반선 시장 독과점 가능성이다. 국내 조선사들은 세계 LNG운반선 시장 지배력이 높고, 최근 수주도 독식하다시피 했다. 대우조선 M&A가 이뤄지면 현대중공업의 세계 LNG운반선 시장점유율이 60~70% 수준으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EU가 시장 과점으로 판단하는 기준(40%)을 웃돈다.
그렇다고 현대중공업그룹이 LNG운반선 사업을 줄이겠다 약속하기도 쉽지 않다. 가장 시장 우위에 있는 사업을 하지 않겠다 하면 M&A의 실익이 없어진다. 그러니 최근엔 LNG운반선 사업의 점유율을 직접 낮추는 방안보다는, 기술을 이전해 해외 경쟁 조선사들의 건조 능력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안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런 간접적인 방법이 언제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질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EU를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많다. 이미 2년 반동안 M&A의 결론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니 늦어도 올해 안엔 어떻게든 ‘결론’을 내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고개를 든다. 두산인프라코어 M&A 등에서 정부 덕을 보긴 했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M&A를 위해 잘 하고 있는 LNG운송선 수주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을 품을 경우 기대되는 시너지 효과가 작지 않다. 조선업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니 구매력이나 수주 협상력, 연구개발(R&D) 면에서도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삼성중공업의 눈치를 살펴 LNG운송선 가격을 정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포스코 역시 후판 판매 시 현대중공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포스코는 후판의 70% 가까이를 현대중공업그룹 쪽으로 판매하게 된다.
대우조선 M&A가 무산되면 현대중공업은 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로드맵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그룹은 건설기계와 조선의 두 축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있는데, 대우조선이 빠지게 되면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 조선지주 아래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을 거느리는 그림이었지만 ‘둘째’로 들이려던 양자가 빠지기 때문이다. 정기선 체제로의 전환도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수만 명의 직원이 있는 기업은 단순히 대주주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지휘하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며 “정기선 부사장 입장에선 대우조선을 인수해서 한국 조선 사업을 일통한다는 업적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 M&A가 무산되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곳은 산업은행이다. 현대중공업이야 대우조선을 인수하지 못하더라도 잃을 것이 많지 않다. 아쉽긴 하지만 실제로 입은 타격은 해외 기업결합 승인 절차에서 들어간 비용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우조선이 없어도 현상유지는 된다.
M&A 무산 시 산업은행은 다시 대우조선을 품에 안아야 한다. 최근 선박 건조 수요가 늘고 있는 점은 다행이지만, 대우조선은 최근 실적이 부진하다. 회사는 2분기 영업손실 1조원을 올렸다. 회사의 자본총계는 기존 4조원 수준에서 올해 말 2조4200억원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수주잔고도 2014년 523만달러에서 작년말 189만달러로 줄었다. 대우조선은 M&A 발표 후 2년반 동안 불확실상 상황에 놓였고, 사업 경쟁력도 약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쨌든 현대중공업그룹이 부득이 대우조선을 인수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산업은행이 져야 한다. 이번에 현대중공업그룹이라는 확실한 인수 주체를 놓치게 되면 대우조선은 다시 표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우조선해양공사’ 체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처럼 사업 경쟁력 하락은 불가피하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대우조선 M&A 무산 시 사업부를 분할해 현대중공업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이는 선박 건조 도크 활용 등 문제로 쉽지 않다는 점이 이미 수년 전에 입증됐다. 그도 어렵다면 몇 년 후에 다시 M&A 매물로 내놓아야 하는데, 대우조선 기업가치 하락은 불가피 하다.
최근엔 정치권과 지역 사회도 대우조선 M&A를 걸고 넘어지는 분위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해운산업의 친환경·스마트화 물결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라며 힘을 싣고 있다. 최근 조선업황이 개선되는 상황이라 구조조정 목소리가 묻힐 가능성이 크다.
산업은행 입장에선 M&A 무산 시 대우조선에 추가적인 증자를 해줘야 할 수도 있다. 수출입은행은 대우조선 영구 전환사채(CB)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M&A를 지원하기 위해 권리 행사를 자제해 왔지만, 앞으로는 원리금 청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은 LNG운송선 건조 기술을 경쟁사에 이전한다는 전략이지만 EU가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지 의문”이라며 “M&A가 무산된다면 현대중공업도 난처하겠지만 가장 힘든 것은 산업은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