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는 나쁠 것 없다면서도 실효성에는 의구심
꼬투리 잡기 주력하던 금감원 '가이드 역량' 부족
알맹이 없으니 유화적?…새 정부서도 이어질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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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의 친시장적 행보가 화제다. 대표적으로 이른바 '먼지털이식 감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시장의 기대감은 높지 않다. 작은 꼬투리 잡기에 익숙해진 금감원이 금융사에 훈수를 둘만한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사고가 터지면 언제든 돌변할 수도 있다. 정권 말기다보니 금감원장이 원하는 바를 뚝심있게 밀고 나가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정은보 금감원장은 지난 3일 금융지주사 회장단과 첫 간담회를 가졌다. 정 원장은 이 자리에서 금융사 검사 체계를 사후적 처벌보다 위험의 선제적 파악과 예방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지난 9일에도 시중은행장들에 '가이드'에 중점을 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검사 인력이 한 달씩 금융사에 진을 치고 위규·위법 사항이 나올 때까지 흔들어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금감원은 이달 중순으로 예정했던 우리금융지주·우리은행 종합 검사를 미뤘다. 정은보 금감원장은 전문 경제 관료로서 국내외 금융 시장과 경제 정책에 능통한 인사로 금융사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성향에 맞춰 검사 방식을 개편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사들은 일단 금감원의 유화적인 제스처가 나쁠 것은 없다면서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다.
금융감독원은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업무' 등을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갈수록 역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금융사의 근간인 의사결정 및 관리에서의 '절차와 시스템'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해야 하지만, 실제로 문제 삼는 것은 지엽말단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부 지점의 불완전 판매, 고객 확인 규정 위반 등을 지적하고 '징계’ 등 과제를 남겨두는 식이다. 방대한 검사는 쉽지 않으니 이마저도 대부분 제보를 받아 검사 대상을 특정하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선 금융사들은 약관의 금감원 인력조차 실적 쌓기, 책임 회피에 혈안이 돼 있다며 혀를 찼다.
금감원이 금융지주 회장이나 은행장들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수장이 걸리면 반발이 격렬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라임사태 등 큰 사건들엔 회초리를 들었지만 이는 금감원이 사전적으로 나섰다기보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됐을 뿐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선 금융사 경영진을 지적할만한 전문성이 확보되지 않으니 실무진의 ‘행위 위반’ 사안만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국내 금융 시스템이나 금융사의 존립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위반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고 징계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금감원이 편하게 쓰는 카드다.
금감원의 금융사 털기가 검사 자체보다는 다른 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많았다. 금감원은 최근 들어 금융사에 법률자문 내역을 제출하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금융사들은 ‘자기 방어권’ 침해라며 반발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큰 비용을 들여 금감원 출신 전관이 있는 법무법인과 손을 잡기도 했다. 최근 금감원 인사들은 사석에서 ‘이제는 법무법인이 금융사 자문으로 돈 벌기 어려워 진 것 아니냐’는 농을 던지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감사가 금융사 공격과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돼왔다고 볼 여지도 있다.
지금까지 관행과 전례를 감안하면 금감원이 회초리를 내려놓고 금융사들이 나아갈 길을 앞장 서서 알려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금감원장의 부드러운 발언이 이어지며 시장에선 종합감사 폐지를 예상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정은보 금감원장은 11일 지방은행장과 간담회 후 사후감독의 핵심인 종합검사에 대해서는 폐지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금감원장의 시장 친화적 행보는 그만큼 지금 금감원에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전임 윤석헌 원장은 자기 소신대로 '소비자 보호' 깃발만 보고 달렸지만, 지금 정은보 원장에 부여된 임무는 다소 모호하다는 것이다. 정은보 원장은 여러 차례 금융사의 '내부 통제' 문제를 거론했는데, 이는 금융사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개선해 나가야할 문제지 감독당국 수장이 앞장서 챙길 사안까진 아니란 지적이다.
한 금융사 임원은 "이번 정부는 금융업에 관심이 없었고 정권말 금감원에 어떤 역할을 맡아달라는 명확한 신호도 보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핵심 역할이 모호한 금감원 입장에선 굳이 나서서 금융사와 척을 질 이유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지금 금감원의 친시장적 행보가 수장의 소신과 철학에 따른 것이라 해도 얼마나 흔들림없이 유지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정권말 금융감독당국 수장의 입지가 공고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은 임기는 사실상 3개월로 봐야한다는 시선도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수장이 바뀐다면 금감원은 예전의 타성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