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에 적극, 역동적인 한국 시장 주목
일부 대기업·플랫폼에만 몰리는 '한계'
정치 논리·세계 표준과의 괴리 고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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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한국 기업과 콘텐츠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인식이 크게 개선됐다. 대기업의 해외 인지도가 높아졌고, 글로벌 투자사는 한국에서의 성과에 고무됐다. 글로벌 사모펀드(PEF)들은 플랫폼 기업 경영권 인수에 수천억원을 들였고 소수지분 투자에도 조단위 자금을 쏟아부었다. 부동산, 물류센터 등 실물 자산 투자가 많아졌고 한국 시장 접점을 늘리기 위해 수뇌부를 다시 꾸리는 기관도 있었다. K-컬처가 전세계에서 각광 받듯 투자 시장에도 ‘K-인베스트(K-invest)’ 바람이 부는 모습이다.
소규모 기업들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이전까진 국내 소형 벤처캐피탈(VC)이나 PEF로부터 성장 자금을 받는 것이 지상과제였지만, 이제는 글로벌 PEF에 손을 벌리는 사례가 늘었다. 대부분 해외 진출을 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투자안내서를 보내는 식인데, 어쨌든 글로벌 PEF의 눈에 들면 기업가치가 급증한다. 한 회계연도가 돌기도 전에 기업가치가 30% 이상 뛰기도 한다.
작년까지 적자이던 한 화장품 제조사는 베인캐피탈, 모건스탠리 PE 등 글로벌 PEF에만 투자 의사를 타진했으나 이제 막 성과가 본격화하는 시기다 보니 투자 유치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다른 온라인 가구 업체도 해외 시장을 넓히겠다며 잠재 투자자들에 투자 의향을 물었는데, 소규모 투자가 어려운 글로벌 PEF들은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국계 투자사 관계자는 “작은 기업들은 일단 해외 시장 확대 명분으로 수백억원 규모 지분 투자를 할 수 있냐고 묻지만 규모가 너무 작으면 제안을 받기 어렵다”며 “회사 측에선 경영권을 가져가도 되니 투자 규모를 늘려달라고 역제안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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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투자 시장에서 한국이 부각되는 배경엔 넘치는 유동성이 있다. 투자사들은 작년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춤했으니 올해는 자금을 적극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해외 금융정보사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올 3분기까지 글로벌 인수·합병(M&A) 규모는 약 4조3000억달러였다. 연말까지 기존 최고 기록(2015년 4조8000억달러)을 너끈히 넘길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아시아에선 역동적이고 신산업이 속속 나타나는 한국이 주목받았다. 해외에 상장(IPO)한 쿠팡, 몇 개월 만에 수백%의 내부수익률(IRR)을 기록한 카카오뱅크 등 성과들이 쌓이니 해외 투자사들이 기회를 찾아 혈안이 됐다.
한국은 한때 글로벌 투자 시장의 변방으로 여겨졌지만, 몇 년 새 분위기가 달라졌다. 굵직한 위기를 거치며 전문 인력의 역량이 강화됐고 시장 규모도 커졌다. 팬데믹 초기 타격을 입은 주식 시장은 이후 호황을 구가하며 극적 반전에 성공했다. 네이버·카카오 같은 토종 IT 기업들이 글로벌 공룡에 종속되지 않고 살아 남은 사례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주요 대기업들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갖췄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도 적극 대응한다. 해외에서 현대차와 SK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됐다. 합작법인(JV) 설립도 과거엔 우리 기업이 읍소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아마존, 우버 등과도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한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이후로는 ‘K-콘텐츠’ 관련 기업에 러브콜이 이어진다. 국내 PEF가 해외 대형 M&A에 나설 땐 투자은행(IB) 본사에서 핵심 출자자(LP)의 성과까지 뜯어볼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한국은 지정학적 반사 효과도 봤다. 일본은 아직도 연필로 투표를 할만큼 문화가 보수적이다. PEF 시장도 독자적·폐쇄적이라 글로벌 투자자들의 선호도가 낮았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 체제에서 예측불허 규제를 쏟아내며 투자자들의 원성을 샀다. 중국에서 빠진 자금은 한국에 눈을 돌렸는데 야놀자, 뤼이드 등이 수혜를 입었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는 올해 3분기까지 114억2500만달러(약 13조5000억원)로 역대 2위 수준이다. 이미 작년 전체 기록도 뛰어 넘었다.
글로벌 PEF의 경영진엔 지한파 인사들이 속속 채워졌다. KKR은 한국계 미국인 조셉 배를 공동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고, 칼라일그룹은 작년에 이규성 단독 대표 체제를 꾸렸다. 블랙스톤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한국계 마이클 채다. 이들은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도와 투자 의지가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안에 따라 크레딧펀드, 인프라펀드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한 국내 투자업계 관계자는 “SK E&S 투자는 KKR 조셉 배 CEO가 끝까지 밀어붙여서 따낸 거래”라며 “현재 아시아에서 투자할 만한 곳은 한국 정도다 보니 큰 거래는 자금력을 앞세운 글로벌 PEF들이 모두 가져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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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장의 매력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들여다 보면 해외에서 관심을 갖는 영역은 제한적이다. 해외 기업과 JV는 대부분 전기차, 수소사업 등 유망한 영역이었다. 전통 제조업 투자는 감소세가 확연했다. 글로벌 PEF가 투자한 곳도 대부분 플랫폼 기업이다. 쿠팡이 ‘한국 1등은 돈이 된다’는 것을 입증했지만, 우후죽순 생겨나는 IT·플랫폼 기업들이 모두 그런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정부가 콕 집은 영역에서 가치가 급등한 기업들이 나타났는데, 정책에 따라 언제든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한 물류 플랫폼 기업은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급히 자금조달에 나섰으나 시장에선 창업주의 욕심을 지적했다.
낙후된 규제,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정책, 글로벌 투자 표준과의 괴리 등은 한국의 고질병이다.
금융당국은 금융 사고가 나면 뒤늦게 강력한 제재안을 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씨티은행 철수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뒷북 조치에 나섰다. 금융사에 대해 배당을 자제하라 압박하는 것은 해외 투자자로선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치솟는 금리를 옥죌만큼 영이 서는 것도 아니다. ‘먼지떨이식’ 금융사 감사를 줄인다지만 금융사들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다. 공매도 금지에 대해선 ‘반(反) 시장적 조치’란 평이 많았다.
한국거래소는 PEF가 최대주주인 기업의 상장 심사 기준을 강화할 것으로 거론된다. 운용사 사이에선 대기업 오너와 차별한다며 볼멘 소리가 나온다. 교보생명, 남양유업 등 각종 투자에서 PEF가 곤경에 처한 것도 해외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키우는 요소다. 해외에선 투자에 배임·횡령 문제가 얽힐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과세당국은 PEF의 탈세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출구 없는 맹공’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입법 기관은 표심에 휘둘린다. 택시 종사자 표를 얻으려 공유 차량 스타트업을 규제한다. 망신주기식 국정감사는 사라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해외에서 주목하는 IT·플랫폼 기업들은 거대악으로 낙인 찍혔다. 주요 그룹들은 의사결정 체계를 손보려 하지만 아직 오너의 존재감이 크다. 정부나 국회, 수사기관이 때마다 오너를 흔들어대니 기업 활동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 외국계 투자사 관계자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망해서 구글과 우버가 시장을 잠식하고 나면 나중엔 구글 사장, 우버 사장을 국정감사에 부를 것이나”며 “정치적 이유로 한국 IT 생태계를 악인화 하는 것이 건전한 방식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