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스튜디오로 '플랫폼'보단 '콘텐츠' 승부
"CJ그룹 내에서 문화사업의 '상징성' 확인"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CJ ENM이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사 엔데버 콘텐트(Endeavor Content) 인수를 깜짝 발표했다. CJ ENM이 1995년 문화사업을 시작한 이후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다.
CJ그룹이 이달 초 10년 만에 그룹 중기비전을 발표한 이후 나온 ‘빅딜’인 만큼, CJ ENM을 통한 그룹의 ‘문화사업’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글로벌 거점을 확보한 CJ ENM은 멀티 스튜디오 체제를 구축해 글로벌 ‘K콘텐츠’ 확장에 드라이브를 걸 전망이다.
-
‘기생충’부터 ‘엔데버’까지…CJ의 ‘할리우드 드림’
CJ ENM은 엔데버 콘텐트를 통해 자체 콘텐츠를 글로벌 타깃으로 리메이크하고, 엔데버의 지적재산권(IP)을 전면 활용해 사업모델 다양화에 나서겠다는 설명이다.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위해 CJ ENM은 수년간 북미의 스튜디오 및 제작사의 인수 기회를 모색해왔다. CJ ENM 측은 “엔데버 콘텐트와 같은 기획·제작 역량을 가진 글로벌 스튜디오가 매물로 나오자 마자 TF를 결성해 적극적으로 인수 협상에 나섰다”고 밝히기도 했다.
CJ ENM의 ‘할리우드 입성’은 그룹 차원의 '숙원'이었다. 지난해 영화 기생충이 미국에서 보인 연이은 수상 행진도 보일 때도 제작투자사인 CJ ENM의 총력이 있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미경 CJ 부회장이 직접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홍보에 앞장 서면서 문화사업을 향한 오너가의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생충으로 미국 본토에서 눈도장을 찍은 CJ ENM은 올해 초부터 본격적인 할리우드 네트워크 확장에 나섰다. 딜 발표와 함께 엔데버의 공동 창립자이자 CEO인 아리엘 에마누엘(Ariel Emanuel)이 “이미경 부회장과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 덕분에 CJ ENM이 엔데버 콘텐트의 이러한 가치를 지속시키는 한편 글로벌로 성장시킬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CJ ENM은 앞서 1월 드라마 제작 자회사인 ‘본팩토리’와 엔데버 콘텐트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추진했고, 양사의 IP를 활용한 콘텐츠 제작을 진행해온 바 있다.
이외에도 CJ ENM과 스튜디오드래곤은 올해 2월 영화 ‘터미네이터’, ‘미션임파서블’ 등을 제작한 미국 할리우드 제작사인 스카이댄스 미디어(Skydance Media)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CJ ENM과 스튜디오드래곤은 파트너십의 일환으로 스카이댄스의 소수지분을 인수했다. 투자와 더불어 잠재 인수 매물도 지속적으로 탐색했다. 엔데버 콘텐츠 인수 결정에 앞서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을 촉발한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파문 이후 매물로 나온 제작사 ‘와인스틴 컴퍼니’도 인수 물망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
엔데버 콘텐츠 인수, 1조원짜리 ‘할리우드 입장권’
업계에서는 CJ ENM의 ‘1조원 파격 인수’가 결국 ‘이름값’이라는 평이다. 네트워크가 특히 중요한 엔터·미디어 업계에서는 ‘현지에서 먹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내로라하는 기업이어도, 전 세계 엔터사업의 중심인 할리우드에선 영향력을 펼치기 쉽지 않다. 국내 주요 엔터사들이 미국 진출을 위해 2000년대 초반 연이어 문을 두드렸다가 소득없이 돌아온(?) 일화들이 유명하다.
방탄소년단(BTS)에서 ‘오징어게임’까지 ‘K콘텐츠’의 글로벌 위상이 급등한 만큼 현지에서도 아시아 시장의 거점 겸 파트너로 한국의 매력도가 올랐고, 엔데버 측도 이런 점에서 CJ 측에 손을 들어줬다는 관측이다. 모기업인 엔데버가 올해 초 지분 매각 의사를 밝히고 사모펀드, 금융사, 글로벌 미디어 그룹 등 다수의 기업들이 인수전에 참여했다고 알려진다.
‘인력’과 ‘네트워크’ 유지가 핵심인 만큼 거래 조건도 해당 부분이 고려됐다. CJ ENM은 인수 이후에도 양 사가 협력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남은 지분은 기존 대주주인 엔데버가 보유하고, 엔데버 콘텐트의 공동 대표인 크리스 라이스와 그레이엄 테일러 등 주요 경영진과 핵심 인력이 그대로 유지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진행했다. 앞서 하이브의 이타카 홀딩스 인수에서도 설립자인 스쿠터 브라운을 이사회로 영입하고 '5년간 경업금지 및 유인금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다만 인수가 대비 실질적인 수익성, 재무 부담 해소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엔데버 콘텐트의 전체 기업가치는 8억5000만달러(약 1조원)로 책정됐다. 2020년 기준 부채가 5490억원, 매출은 635억원 수준이다. 이번 인수를 위해 CJ ENM은 기업어음 발행과 금융기관 차입으로 총 9000억원의 차입 부담을 올렸다. NICE신용평가에 따르면 CJ ENM의 올해 3월 기준 부채비율은 61.5%, 순차입금의존도는 7.4%, 총차입금은 1조409억원으로 양호한 재무구조를 보이고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CJ ENM 시총이 3조7000억원 수준인데 1조원에 샀으니 꽤 힘쓴 딜인 셈”이라며 “통상 해외 비상장사, 특히 엔터 업계 회사들의 내실은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엔데버도 ‘싸게 산’ 거래는 아닌 것으로 보이고 보여줄 시너지와 ‘이름값’이 어느 정도일 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동시에 SM엔터 등 다른 딜을 진행할 여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CJ ENM은 JP모건을 단독 금융 자문사로, 글로벌 로펌 오멜버니 앤 마이어스(O'Melveny & Myers)를 법률 자문사로 선정하고 딜을 진행했다. JP모건은 올해 상반기 하이브의 미국 기획사 이타카홀딩스(Ithaca Holdings) 인수 건에 이어 연이어 글로벌 ‘엔터 빅딜’을 자문했다. 오멜버니는 지난 9월 CJ제일제당이 미국프로농구(NBA) 구단 LA레이커스와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십 계약도 함께했다.
-
“콘텐츠가 답이다”…그룹의 ‘문화사업’ 방향 보여준 셈
엔데버 인수와 더불어 CJ ENM은 물적 분할을 통해 멀티 장르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별도의 스튜디오 설립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물적 분할 시기 등 구체적인 사항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콘텐츠 유통과 콘텐츠 제작법인을 분리하면서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겨냥하겠다는 설명이다.
콘텐츠 유통은 ‘티빙’에서, IP 관리 및 전략 수립은 ‘CJ ENM’에서, 국내외 콘텐츠 제작은 엔데버 콘텐트와 스튜디오드래곤, ‘멀티 스튜디오’로 분담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스튜디오드래곤과 CJ ENM산하로 다수의 제작사들을 두고 있기도 하다. 강호성 CJ ENM 대표는 “멀티 스튜디오 체제로의 변신은 CJ ENM이 글로벌 토탈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멀티 스튜디오 체제 수립은 CJ그룹이 ‘컬쳐’ 부문에서 CJ ENM이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미디어 사업은 대중적인 영향력은 높지만, 투자 비용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OTT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K콘텐츠’의 역량도 확인했고, 이에 ‘플랫폼’에 힘을 싣기 보다는 ‘콘텐츠 제공자’로서 IP의 가치에 집중하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제작사 인수를 늘려가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는 분석이다. 자체 유통 플랫폼인 티빙이 있지만, 사실상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애플티비, HBO맥스 등 글로벌 거대 플랫폼과 경쟁은 쉽지 않다.
물적 분할 등 멀티 스튜디오 체제가 CJ ENM 자체 수익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성을 생각하면 CJ그룹의 전략은 미래성이 높다는 평도 있다. 해외 유력 제작사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직접 인수하면서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등 글로벌 업체들과도 협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또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CJ그룹에서 캐시카우인 제일제당(대한통운)이 있고 나머지 계열사들은 ‘양 축’ 정도로 올라오진 못하는 상황인데, CJ ENM은 상징성이 큰 상황”이라며 “글로벌 콘텐츠 사업에서 이미경 부회장이 앞단에 서 있는 만큼 오너가의 ‘K컬쳐’를 향한 집념(?)도 ‘단순 비즈니스’ 이상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