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지분도 매물로…유사 사례 이어질 수
투자금 등 각종 비용 담보 대출로 충당하기도
현대차그룹은 ENG·글로비스 지분 출회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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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그룹 오너 일가가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 지분 매각 행보에 나섰다. 보유자금만으론 높은 상속세를 감당하기 어렵다 보니 승계가 완료되지 않은 대기업에서 이와 유사한 지분 매각 사례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들은 오너를 중심으로 신사업 확장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기본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 지분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작년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 후 삼성그룹 오너 일가는 12조원 이상의 상속세를 신고하며 분할 납부 계획을 밝혔다. 지난 10월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보유 지분 일부에 대해 처분신탁 계약을 맺었다. 이서현 이사장의 삼성생명 주식이 팔렸고, 홍 전 관장의 삼성전자 지분도 본격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이서현 이사장의 경우 2018년말 삼성물산을 떠난 후 이렇다 할 경영 행보를 보이지 않았던 터라 상속세 마련 외에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삼성그룹 승계의 핵심은 삼성전자인데, 9월말 기준 이재용 부회장과 특수관계인의 삼성전자 지분은 21.15%다. 경영권 지배력이 아주 크지 않음에도 막대한 상속세를 내기 위해 0.33%에 달하는 지분을 내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재계 1위도 세금 부담에 핵심 지분을 팔았기 때문에 다른 대기업들도 이런 방식을 따를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금융사나 투자사, 투자은행(IB)들도 일감을 기대하고 있다.
LX그룹은 LG그룹과 블록딜을 통해 지분 정리를 마무리, 계열 분리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 16일 구본준 LX그룹 회장은 지분 정리를 통해 LX홀딩스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했다. 구본준 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LG 주식 7.72% 중 4.18%를 외부 투자자에 블록딜 방식으로 팔고, 이 주식매각 대금으로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보유한 LX홀딩스 지분 32.32%를 샀다.
이번 거래로 구본준 회장의 LX홀딩스 지분은 40.04%로 늘었고, ㈜LG 지분은 2.04%로 줄었다. 구형모 LX홀딩스 상무 등 구 회장 일가가 보유한 LG 지분을 모두 합해도 2.96%다. 공정거래법상 계열분리 요건인 동일인 관련자 ‘지분 3% 미만’ 요건이 충족된 것이다. 지분정리를 끝낸 LG와 LX의 이별은 내년에 공정거래위원회가 계열 분리를 승인하면 마무리된다.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롯데지주 보통주 98만3029주(지분율 0.94%)를 전량 매도했다. 매각 금액은 288억4400여만 원이다. 앞서 신 전 부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롯데쇼핑과 롯데칠성 주식도 모두 매도했다. 매각 금액은 롯데쇼핑 158억원, 롯데칠성 32억원가량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지분 매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지분을 대거 매각함에 따라 롯데제과 지분 1.12%만 보유하게 됐다.
최근엔 고(故) 박연차 회장의 재산을 상속한 사주일가가 수천억원 규모 세금을 태광실업 주식으로 납부하기로 했다. 비상장 주식인 데다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실사가 어려웠던 탓에 상속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물납 결정이 이뤄졌다. 워낙 상속세액이 컸던 터라 수많은 금융사와 사모펀드(PEF)들이 돈을 빌려주겠다거나 지분 일부를 받아주겠다는 제시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금융사 관계사는 “작년 태광실업 일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사 십여 곳이 제안을 넣었다”며 “최근 삼성도 그렇고 그룹 총수가 사망하면 상속세 문제로 주식 매각의 큰 장이 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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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엔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정 명예회장의 장남 정몽진 회장의 KCC 지분 일부가 상속세 연부연납을 위한 담보로 제공돼 있다. 한진칼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형제들과 갈등을 빚은 후 오너 일가 지분율이 낮아졌다. 2019년 조양호 회장 별세 후 ‘남매의 난’이 빚어졌는데, 당시 갈등의 원인이 상속세를 부담할 만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평가도 있었다. 오너 일가의 지분 대부분이 대출 담보로 잡혀 있다.
작년엔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 8.22%씩을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에 증여했다. 정 부회장과 정 총괄사장은 각각 이마트와 신세계 주식 일부를 납세 담보로 제공한 바 있다. 이들 남매는 물려받은 사업에 대한 애착이 커, 지분율을 더 낮출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평가다.
롯데그룹은 수년 전 신동빈 회장 체제가 공고해졌고, 한화그룹은 김동관 사장 포함 세 아들에 우회적으로 힘이 실리고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총수 지분이 상속·증여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현실화한다면 지분을 받는 쪽에 수천억원의 세금 부담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주요 그룹 오너 일가들은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세금을 내거나 투자 재원을 마련하려 해도 직접 가진 현금은 많지 않고, 가용 자산은 물려받은 주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SK㈜ 지분 일부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 최 회장은 2018년 SK㈜ 지분 약 4.7%를 형제 등 친족에게 증여하기도 했는데, 현재 지분율은 17.5%로 지배력이 아주 공고하지는 않다. 노소영 관장과 이혼소송이 진행 중인 만큼 향후 막대한 재원이 필요할 수 있는데, SK㈜ 지분율을 더 낮추긴 쉽지 않다. 개인 투자 성과를 내거나 보유 지분을 더 활용하게 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아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사장도 현대중공업지주 지분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정 사장은 2018년 현대로보틱스 지분 5.1%를 KCC에서 3540억원에 사들였는데, 3040억원은 정 이상으로부터 증여받고 500억원은 주식담보대출을 받기도 했다. 정 사장이 상속받을 주식이 조단위에 이르는 만큼 지주의 신사업 투자를 확대해 배당 수익을 늘릴 필요성이 크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오너일가가 경영권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지분을 대량 매매하면 주가 충격을 줄이며 목돈을 거둘 수 있고, 투자자들도 지분을 싸게 살 수 있으니 서로 윈윈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는 정의선 회장 보유 지분이 따로 담보로 잡혀 있지는 않다. 다만 아직 승계가 마무리 되지 않은 만큼 지분 매각 가능성은 꾸준히 거론된다.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후에도 잔여 보유지분을 시장에 매각할 가능성이 크다. 이 외에 현대글로비스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로 정몽구 명예회장과 함께 보유하고 있는 지분 중 10%도 팔아야 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