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와 겹치며 투자 유치 효과 극대화
현대ENG, 글로비스 지분 활용 6000억 마련
정의선 회장 자금마련, 계열사 이해관계 ‘합치’도 중요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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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현대글로비스가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 칼라일그룹을 3대 주주로 맞이했다. 이로써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개편에 대한 불확실성은 일정 부분 해소가 됐다. 이번 거래는 정부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벗어나기 위한 성격이 강하지만 정의선 회장으로선 규제 회피와 더불어 대규모 승계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였다. 때마침 국제가전박람회(CES)에서 현대차그룹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글로벌 최대 규모 PEF와 협업은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은 지난 5일 보유하고 있는 현대글로비스 지분 약 10%를 칼라일이 설정한 특수목적법인(SPC)에 블록세일 방식으로 매각했다. 주당 매각금액(16만3000원)은 종가 대비 할인율이 적용됐다. 다만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추후 칼라일의 우군으로서 역할을 기대하면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다.
이번 거래를 통해 칼라일은 현대글로비스의 이사 1인 지명권과 정 회장이 글로비스 지분 매각을 추진할 경우 동반 매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Tag Along)을 확보했다. 칼라일은 미국 본사에서 이번 거래를 직접 진행했고, 보유한 크레디트펀드를 통해 자금을 출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정 회장 일가의 글로비스의 지분 매각 가능성은 예견돼 온 수순이다. 정부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범위를 기존 오너 일가가 30% 이상 보유한 기업에서 20% 이상 보유한 기업으로 확대했고, 글로비스 자체적으론 그룹 내부거래 비중을 규제 범위 밖으로 줄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015년 정부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를 앞두고 글로비스 지분 43%를 보유하고 있던 정 회장 부자는 블록딜을 통해 13%의 지분을 시장에 매각하며 지분율을 30%까지 낮췄다. 이번에도 블록딜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또 한 번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분산하면 우호지분의 비율이 크게 낮아지며 경영권을 위협받을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에 사전 교감이 있던 PEF를 우군으로 받아들였단 해석이 가능하다. 2018년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헤지펀드 운용사 엘리엇매니지먼트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각 계열사의 지분 관리가 중요한 상황이기도 하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그룹과 거래를 맺고 싶은 국내 투자자들은 굉장히 많지만 대부분 외국계 PEF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현대차그룹의 이력을 살펴보면 칼라일과의 거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라고 말했다.
이번 거래 이후 정몽구 명예회장은 글로비스 지분을 보유하지 않는다. 정의선 회장의 지분율은 20%로 떨어졌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약 4100억원을 정의선 회장은 약 2010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크게 줄어들었으나 투자자들은 오버행 이슈 해소라는 호재로 받아들이며 6일 글로비스의 주가는 10% 가까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계열사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번 거래 또한 장기적으론 정의선 회장의 지분 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의선 회장은 글로비스 지분뿐만 아니라 현대엔지니어링의 기업공개(IPO) 과정에서 구주매출을 통해 약 4000억원을 확보하게 된다. 올해 들어 지분을 통해 마련한 자금만 약 6000억원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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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진행될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개편안을 단정적으로 예견하긴 어렵다. 그러나 정의선 회장이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와 현대차의 지분을 승계한다는 가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평가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 지분(5.33%) 가치는 약 2조4300억원, 현대모비스 지분(7.15%) 가치는 1조1400억원으로 총 4조2000억원 수준이다. 현시점 상속세율 50%를 단순 적용했을 때 2조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정의선 회장이 재차 글로비스 지분 매각에 나설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추후 지배구조개편 과정에서 지분 스왑 등을 통해 그룹 지배구조 상단에 위치한 계열사의 지배력을 높이는 방안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다. 올해 들어 정의선 회장이 확보하게 된 현금 이외에 그동안의 배당을 통한 자금 마련을 비춰보면 일정 수준의 재원 마련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현재 정의선 회장이 보유한 각 계열사 지분가치는 약 4조원으로 주식담보대출, 연부 연납 등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현대차그룹과 정의선 회장이 공동으로 투자한 로봇 개발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 또한 정 회장의 주요한 업적이자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CES에 참석한 정 회장은 로봇을 활용한 모빌리티 산업 구상 계획을 발표하며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투자자들로부터 주목도를 끌어올렸다. 정 회장이 직접 보유한 지분은 20%로 4~5년 후 IPO가 현실화하면 이 또한 구주매출을 통해 현금화가 가능하다.
현대차 지배구조개편은 올해부터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계열사의 분할 합병 등과 같은 방안은 이미 한차례 투자자들의 반대에 가로막혔기 때문에 지분을 오롯이 사 오는 ‘정공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정 부회장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막대한 현금을 확보해 온 것을 차치하고, 앞으로 자본시장 내 거래들이 정의선 회장의 개인적 자금 마련을 위한 작업으로만 비쳐지지 않게끔 하는 작업도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