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이어 원자재 급등…ESG 드라이브 '부작용' 평도
친환경 사업 수익성도 타격…사업 가치 조정 불가피
ESG 대응 빨랐던 국내 기업 신사업에도 영향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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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글로벌 에너지 패권 다툼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론은 러시아의 잔혹함을 주목하지만 시장에선 코로나 팬데믹 이후 유럽이 밀어붙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트렌드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원유, 가스 등 에너지를 포함한 원자재 가격 전반이 요동치는 가운데 지난 2년 동안 부상한 ESG 맞춤형 기업의 가치 조정 등 청구서가 날아들 거란 우려가 나온다. 당장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한 국내 주요 그룹의 친환경 사업도 예외가 아니다.
외신에선 지난 1월부터 일부 헤지펀드를 중심으로 친환경 에너지 관련주에 대한 공매도 전략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수소와 풍력발전, 플라스틱 재활용 등 서방 기업이 주 대상이다. 금리 인상과 약세장 진입을 코앞에 두고 도덕적으로 올바를 뿐, 이익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기업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당시 원유와 가스 등 화석 연료를 매수하고 친환경 기업을 매도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던 투자가들은 이미 상당한 이익을 남겼을 것이라 추정된다. ESG 트렌드가 일시에 무너질 것이라 점치기는 어렵겠지만, 전쟁을 기점으로 거품이 빠질 거란 추측은 일부 들어맞은 셈이다.
미국이 금리 인상에 나서야 할 시점에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전쟁으로 유럽의 러시아산 에너지 독립에 힘이 실릴 거란 낙관적 전망도 내놓고 있다. 러시아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 공급 물량의 11%로 미국에 이은 2위다. 비중이 16%에 달하는 천연가스는 유럽 물량의 41%를 책임지고 있다. 러시아가 몽니를 부리니 유럽이 화석연료를 버리고 친환경 에너지 전환 시점을 앞당기지 않겠냐는 얘기다.
실제로 금융에 이어 원자재까지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하며 전쟁이 결국 실패로 돌아갈 거란 기대감도 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만만치 않다. 관점에 따라선 러시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장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서부텍사스유(WTI) 선물 가격은 지난 8일(현지시각) 장중 배럴당 123.70달러를 기록하고 10일 106.2달러까지 하락했다. 그러나 전쟁 이전 상태로 유가가 안정화할 거란 시각은 제한적이다. 미국이 전략비축유 방출 등으로 안정을 꾀하고 있지만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풀고 러시아 물량 공백을 메우기까진 중기적으로 유가 불안정이 지속될 수 있다.
중기적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 압력이 지속될 전망인 가운데 원자재 가격도 영향을 받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원자재지수 주간 상승률은 10%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러시아가 글로벌 공급 물량의 11%를 차지하는 니켈의 경우 지난 8일(현지시각) 장중 100% 이상 폭등하며 거래가 중단되기도 했다. 제련 원가의 34%가 전력비인 알루미늄 가격도 이달 들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원자재 가격이 전방위로 치솟으면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비용도 덩달아 뛰게 된다는 설명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신재생 에너지 등 친환경 사업이 당장 경제성을 확보한 것도 아닌데 앞으로는 수익성 감소를 감수하고 투자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니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고비용 저효율을 택한 것"이라며 "러시아산 가스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량을 끌어올리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미국이 이를 해결해 주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U는 에너지 위기 대응과 방위비 충당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 채권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의 전쟁 위협에 대응하는 동시에 러시아에서 시작된 인플레이션 우려로 팬데믹 때처럼 완화적 정책을 고려하는 것이다. 불가피한 선택이란 평도 나오지만 올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확정적으로 올릴 전망인 터라 안팎에서 불안한 시선이 상당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뿐이지만 유럽 전체가 휘청이고 있는 셈이다. ESG가 원유와 가스 수출에 의지해온 러시아 경제에 특히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업자득이란 냉소적 반응도 관측된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지속 가능한 미래라고 포장을 했지만 사실은 탄소 배출량이 높은 산업에 비용 부담을 안기는 방식이었으니 신흥국 사다리 걷어차기란 말이 많았다"라며 "서방 국가가 친환경·신재생 에너지에서도 우위에 있기 때문에 결국 자국에 유리하고 비용 부담이 불가능한 러시아 같은 나라에 불리한 내용"이라고 말했다.
서방 국가의 ESG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한 국내 기업 역시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내 기업의 경우 코로나 이전부터 정부 차원에서 신재생 발전을 추진해왔음에도 유럽의 ESG 드라이브로 인한 영향이 상당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과 EU 모두가 탄소중립 계획을 강화할 때 각지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탄소 배출량이 높은 국내 '차화정(자동차·석유화학·정유)' 사업을 보유한 그룹이 급격한 사업 구조 개편에 나선 바 있다.
SK그룹과 LG그룹의 배터리 사업이 잇따라 물적분할과 상장 추진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연초 기업공개(IPO)를 통해 시장에서 10조원 이상 공모 조달에 나섰던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의 경우 사실상 미국과 유럽에 배터리 인프라를 대신 설치하기 위한 비용이란 평도 있었다. 각각 폭스바겐과 포드, GM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 물량을 확보하며 충분한 보상을 받았지만 국내 증시엔 상당한 충격을 남겼다.
SK그룹의 경우 SK이노베이션을 포함해 계열사 전반이 가장 급격하게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에 나선 편이다. 화석연료 관련 사업 지분을 매각하고 친환경 신사업에 투자하는 식이다. 포스코 역시 철강 사업을 분할해 지주사 전환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현대자동차그룹과 함께 지난해 출범한 수소 기업 협의체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제외하면 지난 2년간 우후죽순 출범한 친환경 신사업 대부분이 시장 초입에 있거나 유의미한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유럽 경제와 함께 ESG 트렌드가 위협받을 경우 국내 기업의 친환경 사업 가치 역시 조정 대상에 오를 수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금리 인상과 인플레가 겹치며 전기차 배터리까지 흔들리는 상황에서 수소나 풍력발전, 친환경 소재 사업 가치도 어느 정도 거품을 빼려는 움직임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정유, 화학 사업 등이 그간 시장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것과 정반대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본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