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ㆍ올해 동시다발적인 수천억원대 펀드 조성
표면상 '유니콘 될 기업 투자해 시너지 낸다' 목표
갹출 형태ㆍ일원화된 투자는 자칫 계열사 투자기회 상실
순수하게 내부서 운용… 투자한 회사에 이사도 파견 안해
대외과시용 소지도…자칫 스캔들 터지면 지주사 공동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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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3대 시중은행을 포함, 금융지주사들이 일제히 대형 펀드를 조성해 '스타트업ㆍ신기술ㆍ플랫폼 투자' 에 나섰다. 금액도 크다. 신한금융은 작년과 올해 각각 3000억, 내년까지 관련 펀드가 조성된다면 거의 1조원 규모다. KB금융도 3000억원, 하나금융도 3000억원 펀드를 마련했다.
벤처펀드가 3000억원이면 상당한 규모다. 이만한 펀드를 '보수적인 투자성향'의 대명사인 시중은행과 금융지주사가 마치 누가 시키기라도 한듯 동시다발적으로 내놓았다. 자금출처는 전부 금융지주 소속 은행ㆍ보험ㆍ증권사들로부터 갹출한 '자기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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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도 이제는 신산업이 이끄는 변화된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진리다. 한해 6조원 이익을 내는 KB금융 시가총액이 23조원인데, 연간 적자만 2000억원 가까운 토스뱅크가 외부투자ㆍIPO를 준비하며 20조원 시가총액을 기대하는 시대다. 그러니 3000억원이 적은 규모는 아니지만, 이 자금으로 각 금융지주 계열사들에게 혁신의 DNA를 주입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수 있다.
그런데…각 지주사들이 밝힌 투자방식을 따져보면 석연찮고, 애매모호한 구석들이 한둘이 아니다.
첫째, 모든 펀드 조성시기가 딱 작년과 올해다. 신산업에 대한 관심이 부각된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신한금융이 작년 4월 첫 테이프를 끊자, 뒤이어 KB금융이 작년 말에, 그리고 얼마전 하나금융이 뛰어들고, 다시 신한금융이 추가펀드를 조성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닐텐데 펀드 규모도 모두 동일하고, '벤처 생태계 육성'이라는 테마도 똑같다.
지난 2년간 은행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면서 '역대급 이자 잔치', '코로나2년에 국민을 쥐어짰다' 등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니 이런 때 누군가 선한 의도로 "이자장사 그만큼 했으면 기부(?)도 하셔야지"라는 압박을 놓기에는 딱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름만 다를뿐, 금액도 투자스킴도 시기도 모두 동일하게 내놓는 3곳 금융지주사의 창의성이 극히 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둘째, 금융지주 산하 은행ㆍ보험사ㆍ증권사ㆍ카드사가 각각 업종 특성에 맞게 해도 될 투자를....굳이 지주사가 일일이 돈을 갹출해서 단일펀드로 굴리고, 여기에 '신한ㆍKBㆍ하나'라는 금융그룹 이름을 내세운다. 신한은 아예 '하나의 신한'이라는 의미를 담은 '원(one)신한'이란 타이틀을 펀드 이름에 달기까지 했다.
"계열사들의 특정기업에 대한 중복투자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 "각 금융 계열사간 시너지 조율이 필요해서다" 등이 금융지주사들의 설명. 그런데 냉정하게 따져서 은행에게 필요한 스타트업 기술과, 증권사에게 혹은 카드사에게 요긴한 플랫폼 기술이 과연 동일할까.
이들 계열사의 필요성을 굳이 지주사가 펀드까지 만들어서 일일이 찍어줘야 할까. 또 대한민국에 스타트업들이 얼마나 많은데 수백~수천 곳에 투자할 것도 아니면서 특정 스타트업에 대한 중복투자까지 미리 걱정해야 할까.
게다가 지주 내에서도 모든 계열사가 은행ㆍ증권사처럼 살림살이가 넉넉한 것도 아니다. 이들에게는 지주사에 내줘야 할 몇백억원의 '갹출금'이 자칫 큰 기회비용의 상실이 될 수도 있다. 지주가 요청하는 펀드에 수백억원을 출자하면 그만큼 다른 곳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든다. 그 몇백억원의 어느 금융 계열사에게는 너무나 아쉬운 자기자본일 수 있다.
그러니 이 펀드들이 정말 시너지를 위해서 자금을 갹출한건지, 아니면 "OO금융그룹이 열심히 대한민국의 벤처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습니다"라고 대외에 널리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건지 헷갈릴 정도다.
셋째, 심지어 펀드 운용도 전부 계열사들이 전부 도맡는다. 신한금융은 신한캐피탈이, KB금융은 KB인베스트먼트와 KB투자증권이, 그리고 하나금융은 하나벤처스와 하나금융투자가 전담한다. 물론 이들 회사는 상당한 신산업 투자경력과 노하우를 보유한 곳들이다. 그런데.. 외부에는 이들보다 더 전문적이고 경험을 갖췄다고 평가 받는 운용사들도 넘쳐난다.
단적으로 "OO금융그룹이 벤처투자 3000억원 펀드를 함께 운용할 운용사를 선발합니다"라고 공고라도 낸다면? 아마 내로라하는 거대 운용사는 물론이거니와, 해외 유망한 벤처펀드의 대가들도 달려들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과정은 싹 생략됐다.
KB인베스먼트ㆍ하나벤처스 등은 그래도 업력과 실력이 시장에서 인정받은 경우인데, 신한캐피탈은 PEFㆍVC에서는 운용사(GP)가 아니라 투자자(LP)로 분류되는 회사다. 이런 곳이 1조원에 가까울지 모를 벤처펀드를 운용한다? 따져보면 신한 내에는 신한금융투자도 있고, 대체투자운용을 흡수한 신한자산운용도 있는데 이들을 다 놔두고 캐피탈에만 그룹 운용 물량(?)을 몰아준 모양새가 됐다.
어찌보면 'OO금융그룹의 치적'을 제대로 강조하려면 외부인(?)을 배제해야 해서 이렇게 한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세 지주사가 모두 동일하게.
넷째, 운용방식을 보면 펀드의 목적이 '투자'인지, 아니면 '육성'인지가 헷갈릴 정도다.
신한ㆍKBㆍ하나 세 곳 모두 "투자한 기업에 이사를 파견한다든가, 경영에 개입한다든가 등의 계획은 없다"라고 밝혀왔다. 해당 회사들과 투자하면서 협업을 하거나 노하우를 전수받거나 할수는 있다고 했다. 투자방식도 소수지분에 대부분 상환우선주 등의 메자닌이 선호되는 분위기다. 투자금액도 작다. 일례로 신한의 첫 펀드는 3000억원을 조성해서 1년만에 18개 기업 2245억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1곳당 평균 124억원 정도다.
이를 요약하면...."계열사 자본에서 3000억원을 갹출해서 국내에 괜찮아 보이는 스타트업ㆍ신기술기업 한 20곳에 나눠 줄건데요, 그 회사 장부에 기록되는 대출도 아니구요 (달리 말해 회수 불가능성이 있다는 의미), 지분에 투자한다고 저희가 이사를 파견하거나 간섭하지도 않을 거에요, 알아서 돈 받고 잘 하시면 됩니다. 대박나면 우리도 좋구요" 라는 의미다.
투자기업을 20개나 1년만에 골라 돈만 뿌려주고 이사회 참여도 일절 안하는 펀드를 두고 "전략적 펀드" (Strategic Investment)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그냥 단순투자목적 펀드가 맞는 표현이다.
보통 이런 식의 자금배포는 산업은행이나 옛 정책금융공사 혹은 모태펀드 등 이른바 '공공기관'이 해왔다.
정책기관인 이들은 행여 몇몇 투자건에서 실패가 발생해도 국내 산업 생태계에서 좋은 기업들이 유니콘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목적이 먼저다. 그런데 이런 정책목적성 펀드 운용 방식을, 엄연히 증시에 상장되어 있고 "PBR 0.5배 이하는 너무 한 것 아니냐" 며 주가가 낮다고 수시로 주주들에게 비난 받는 금융지주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앞다퉈 채용하고 있다.
금융지주사들은 이 펀드들이 신산업과 산하 계열사의 접점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일례로 가장 먼저 투자를 단행한 신한은 신한은행이 데이타 회사와 손잡고 배달라이더 대출상품을 내놓았고, 신한카드사가 블록체인 업체 블록오디세이와 대체불가능토큰(NFT) 발급·조회 서비스를 선보였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의 시너지를 만드는 데 굳이 지주사가 펀드까지 만들며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다. 각 계열사가 자기 수준에 맞게 직접 고르고 해당 기업과 접촉하면 그만이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산하 계열사와 신산업의 점점이 중요하다면 되레 금융지주가 만든 펀드라는 '단일창구'가 오히려 거슬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각각의 투자는 모두 신한캐피탈ㆍKB증권과 KB인베스트먼트 등ㆍ하나벤처스 등 운용사가 결정한다. 투자심의위원회도 이들이 개최하고 이들이 거부하면 투자를 진행할 방도가 없다. 그러니 자기자본을 갹출 당한 계열사들로서는 어느 신기술 회사와 접점을 만들려면 계열내 운용사와 한번 더 접촉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생긴다.
이런 과정까지 지주 차원에서 조율하려면? 누가 뭐래도 관리인원이 많아야 하는데 그나마 관련인력이 가장 많은 편에 속하는 하나금융이 하나벤처스 투자본부 15인ㆍ하나금융투자 신기술 금융실 6인이다. 두 해 연속 3000억원 펀드를 운용하는 신한캐피탈의 담당 운용역은 5명이다.
이들이 이 펀드만 담당하는 것도 아닌데, 1년에 20개 가량의 회사를 발굴하고, 투자를 집행하고. 장부관리도 하면서, 10개가 넘는 금융지주 산하 계열사 실무진과 시너지를 일일이 조율한다? 현실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놓고보면 정말 이 펀드들이 금융지주사 순수 자의(?)로 만들어졌을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차라리 "사회 공헌도 좀 하시지"라고 누군가 팔을 비틀고, 여기에 '사모펀드면 다 됩니다"라는 게으른 펀드 만능주의가 결합한 결과물이라고 보는게 더 합리적인 듯 하다.
그래도 시작이야 어쨌든....공룡처럼 비대하기만 한 금융그룹에게 변화의 원동력을 조금이나마 제공한다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투자기업 가운데 '야놀자' 같은 유니콘들이 몇 곳이나 생겨, 이런 삐딱한 시선을 단숨에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따져보면 한해 5조원대의 이익을 내면서도 오만가지 규제에 손발이 다 묶여 투자꺼리를 찾기 힘들어하는 금융지주에게 있어 3000억원은 그리 큰 돈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훈훈한 결론으로 이어지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조금 더 있다.
국민연금이나 각 공제회, 혹은 은행ㆍ보험사 같은 기관들이 외부 운용사를 선정하는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즉 외부 운용사의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마(魔)가 끼더라도 외부 운용사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
만약 유력 정치인과 연관된 스타트업에 투자했다거나, 그 회사에 은행이나 지주 고위 임원이나 경영진 친인척이 근무했다거나 해도..."그건 외부 운용사가 한 일이에요"라고 피해갈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각 금융지주사 산하 전 계열사가 십시일반으로 자기자본을 모아서 조성하고, 운용조차도 순수 내부 계열사에게만 맡긴 펀드에서 행여라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메가톤급 스캔들'이나 정치권 게이트로 번질지도 모른다. 자칫 운용사 임원ㆍ대표 몇명 사임으로 그치지 않고 지배구조를 완전히 흔들 사안이 될 수도 있다.
순수하고 선한 의도로 투자하고 경영하기에는 피해야 할 발밑의 함정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국내 금융사가 겪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