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 얼어붙고 채권시장 변동성 커져
발행여건 개선에도 고금리에 기업들은 고민
채권운용파트 “당분간 상황 계속 힘들 것”
발행·운용 모두 하는 보험사가 가장 힘들어
-
팬데믹이 '주식'의 시간이었다면, 엔데믹 분위기에선 '채권'이 주연으로 등장했다. 테크기업의 성장은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키웠지만 현실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원자재 폭등을 야기하며 전 세계적인 물가상승을 이끌었다. 미국은 빅스텝을 이어가며 전 세계의 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기술주는 폭락했고 IPO 시장은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그동안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채권 시장이 화두로 떠올랐다. 상황은 혼란스럽다. 기업들은 고금리 회사채 대신 은행 대출로 고개를 돌리고 있고, 채권 운용파트는 변동성 확대로 고민의 골이 깊다. 자본적정성 위협에 직면한 보험사들은 ‘사면초가’다.
투자 관점에선 고금리 회사채 괜찮은데…발행기업들은 고민
금리가 급격히 오르는 등 채권시장 변동성이 이어지며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기업들의 고민이 깊다. 통상 결산을 마친 이후인 4월부터 회사채 발행이 늘어나지만 올해는 유독 썰렁한 시장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연초효과’에도 불구하고 금리 불안에 대기업 계열사 등 우량 기업들의 잇단 미매각이 나타나며 시장 부담을 높였다.
‘너무 빨리’ 회사채 조달 이자 부담이 높아졌고, 여기에 냉랭한 투심에 미매각 우려까지 겹치면서 5월 현재까지 우량 기업들도 여전히 회사채 시장을 기피하고 있다. 올해 들어 회사채 금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빨라진 긴축 시계에 국고채와 함께 급등했다. 회사채 무보증 3년물은 AA-기준 이달 3.88%까지 오르기도 했다.
‘차라리’ 은행을 찾는 기업도 늘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들어 기업대출은 세 달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현금 여유가 있는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상환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회사채보다 금리가 낮은 기업어음(CP) 자금 조달을 늘리는 상황이다.
한 대형 증권사 DCM채권발행시장) 부문 담당자는 “1~2월은 그래도 전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4월엔 거의 절반 이상 발행이 줄었다”며 “AA급도 흥행을 못하고 금리는 높으니 기업들이 발행을 부담스러워해 회사채 발행 업무가 크게 줄었다. 올해 한동안은 바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발행 시장이 침체되다보니 회사채 발행을 주관하는 증권사들도 대형사, 중소형사 너나할 것 없이 ‘올해 장사’를 걱정하고 있다. 올해 들어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수수료 수익도 전년동기 대비 감소했다.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면서다.
한 신평사 관계자는 “기업의 재무 담당자가 요즘같이 미매각 걱정을 하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며 “등급 평가 공시가 난 후에 취소를 하기도 하는데, 미매각이 나오거나 수요예측 결과가 예상과 너무 다르게 나와 곤혹스러하는 경우가 많다”고 뒤숭숭한 분위기를 전했다.
한편 증시, 가상화폐 등 전반적인 불확실성이 오르면서 회사채의 ‘투자처로의 매력’이 부상되고 있는 분위기도 포착된다. A급 채권이 4% 중반, AA급 우량 채권까지 3% 후반의 금리 수익을 보장하면서다. 대체투자로 몰리던 투자자들이 웬만한 채권 투자만으로 ‘목표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보험사 등 금융사 신종자본증권의 금리는 4% 후반에서 5% 초반에 이른다. 이달 초 신한은행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은 4.50% 금리 수준을 보였다. AAA급으로 국고채만큼의 안정성을 가진 한국전력채권(한전채)의 금리는 4월 들어 3.7% 수준으로 올랐다.
최근 들어서 얼어붙은 회사채 발행 시장도 어느 정도 온기가 살아나고 있다. 불확실성에 극도로 조심스럽던 기관 투자자들도 일부 수요예측에 참여하고 있다. AA급 발행사인 현대백화점, SK에너지의 수요예측에 매수주문이 몰리는 등 우량등급을 위주로 회사채 투자심리가 개선되고 있다. 등급 스플릿이 있는 DL의 회사채 수요예측에도 모집금액 기준 2배 가까이 주문이 들어왔다.
시장 관계자들은 상반기까지는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회사채 발행시장이 풀리고 회사채 금리도 안정을 되찾는 선순환이 나타나면 3분기 들어서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일반적이다. 자본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이 최근 오랜만에 SK에너지의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에 대규모 참여한 것이 발행시장 분위기 ‘반전’의 조짐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 대형 증권사 IB부문 임원은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시장이지만 이젠 시중금리가 ‘올 때까지 온 것 같다'고 보는 분위기다. 금리가 안정 조짐을 보이면 투자자들도 다시 회사채를 찾을 것“이라며 “투자 관점에선 주식도 안좋고, 은행 이자도 크게 안오르고, 크레딧 리스크도 적은 상황에서 채권 투자하기 오히려 좋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
고점인줄 알았는데 금리 또 올라...운용사 "포지션 못 정하겠다"
안정화할 거라 내다봤던 금리가 또 오르면서 채권을 운용하는 운용사들도 향후 운용 계획 수립에 애를 먹고 있다. 당분간 국내외 불안한 매크로 환경이 이어질 거란 전망에 쉽사리 포지션을 잡지 못하는 분위기다.
금리가 요동치다 보니 운용사는 채권 운용에 초단기로 대응하는 등 소극적 자세로 돌아섰다. 금리가 한 차례 급상승한 후 이례적으로 추가 상승하자 손실 폭이 커진 것도 크다.
한 대형운용사 채권본부장은 "통상 금리가 급격히 인상된 후에는 안정화하는 경향이 있으니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전후로 금리 상승세가 잠시 둔화될 때 매도 포지션을 가져가던 운용사마저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다"며 "그러나 빅스텝 가능성에 금리가 다시 요동치며 트레이딩 계좌 위주로 엄청난 손실이 쌓였다"고 말했다.
일부 투자자들은 기준금리 변동기에 유효한 전략으로 장단기 스프레드 전략을 세우고 있다. 한 증권사 채권운용부 임원은 "단기물 금리가 유례없이 중립금리 수준 이상으로 급등해, 장단기 스프레드는 이미 저점을 찍고 반등했다"며 "하반기에 기준금리의 연속 인상 후 최종금리의 윤곽이 잡히면, 중립금리 수준 이상으로 급등한 단기물 금리의 하락이 두드러질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초장기 채권의 품귀현상은 제도적·수급적 이유에 불과한데, 시장에서 국내 경제 성장이 꺾였다는 오해가 생길까봐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대형 운용사 채권본부장은 "내년 새 국제 회계기준(IFRS17) 도입을 앞둔 보험사들이 리스크 대응을 위해 장기물 채권을 사들이면서 공급 쇼티지(부족)가 발생하고 있다"며 "국고채 10-30년 스프레드가 마이너스로 돌아선 나라는 한국뿐이라, 초장기 채권 발행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 전망도 불확실하다보니 당분간은 공격적 대응이 힘들 것이란 관측이다. 한 중소 운용사 채권본부 팀장은 "벤치마크 대비 성과로 평가받는 운용사도 금리 인상기에는 아웃퍼폼하기 어렵다. 매도 포지션을 갖고 듀레이션(잔존 만기)을 줄인 곳이 나름 선방했다"며 "장단기 모두 안전한 구간이 없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할지 고민이 많은 시기가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운용사 채권본부장도 "대내외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가 지속되는 환경에서 크레딧 시장의 수급 여건도 좋지 않을 것"이라며 "긴축기조 강도는 인플레이션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여 인플레이션 추이를 모니터링해 시장에 대응할 것"이라 전했다.
-
"30년물 금리 역전은 처음" 벼랑 끝에 몰린 보험사들
혼란스러운 채권 시장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보험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금리 상승으로 보험사의 보유 채권 가치가 급락하면서 재무건전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일부 보험사들은 운용수익률은 낮아지는데 지급여력비율(RBC)비율을 맞추기 위해 고금리로 자본성증권까지 찍어야 하는 상황이다.
RBC 비율이 급락하며 법정기준인 100%에 미치지 못하는 곳도 나타난다. DGB생명의 1분기 RBC 비율은 84.5%로 지난해 말(223.6%)보다 139.1%포인트 급락했다. 300억원의 유상증자를 통해 108.5%로 높인 상태다. 최근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한화생명의 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RBC비율이 낮아진 타 보험사의 신용등급도 하향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자본 확충을 위해 후순위채 등 자본성증권을 발행하는 보험사도 늘었다. 올해 들어 보험사들이 찍어낸 자본성증권 발행 규모는 2조원을 넘어섰다. 한화생명, KB손해보험 등 보험사 발행이 연이은 점을 감안하면 상반기에만 4조원 상당의 자본성증권이 발행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제는 RBC 비율 방어를 위해 고금리로 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이면 RBC 비율이 신지급여력제도(K-ICS)로 대체돼 자본 건전성 문제가 해결되지만 RBC 비율이 급락한 보험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채권을 찍어내고 있다.
한 중소형 보험사 관계자는 "운용이익률이 3~4% 정도인데 이자는 6~7%가 되니 자금 조달해서 운용해봤자 밑지는 게 눈에 보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보험사 55곳의 지난해 채권이자 비용은 2894억원으로 전년보다 14% 가까이 증가했다. 자본성증권 발행 규모가 더 늘어나는 만큼 이자 비용이 늘어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금리 상승은 보험사의 채권 손익에 긍정적이지만 지금은 호재로 작용하지 않고 있다. 국고채 30년물 도입 이후 처음으로 3년물과 30년물의 금리가 역전되는 상황까지 발생하며 채권 운용 전략에 확신을 갖고 대응하기 어렵다.
한 대형 보험사 채권 운용역은 “변동성이 큰 만큼 갖고 있는 전략에 확신을 갖고 진입하거나 유지하기 어려워 손익 극대화가 어렵다”며 “작은 실수라도 손익과 포지션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라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보험사마다 크레딧 전략도 제각각이다. 일반적으로 보험사는 장기채권을 보유하는데, 금리상승기에는 평가손실을 피할 수 없다. 금리 상승기가 얼마나 갈지 예상하는 바에 따라 장기채권에 대한 전략은 달라진다.
또 다른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새로 유입되는 보험료는 단기물 위주로 매입하고 보유한 일부 장기물은 교체매매 하며 손실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말했고, 한 중소형 보험사 관계자는 “금리가 상승하면 장기채권의 보유이익이 높아져 자산운용 수익률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장기채권 위주로 매입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