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분산 투자만으론 한계…경영권 거래도 기웃
스타트업 오너 지분 희석 없는 대출성 투자 검토도
PEF·VC 영역파괴 가속화…장기투자 사례 늘어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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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유동성 호황기가 저물어 가며 벤처캐피탈(VC) 업계에선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고민이 늘고 있다. 스타트업 쪼개기 투자만으론 대규모 회수 성과를 내기 어려워지니 덩치를 키워 경영권거래(Buyout)에 참여하려는 욕구가 많아졌다. 지분율 희석을 우려하는 초기 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대출펀드(PDF) 활용을 검토하려는 곳도 생겼다. 사모펀드(PEF)의 성장 기업 투자도 늘고 있어 VC와 PEF의 영역파괴 바람이 점차 거세질 전망이다.
올해 들어 투자 시장의 열기가 빠르게 식고 있다. 각종 악재에 유동성의 힘이 급격히 줄어들며 벤처캐피탈과 스타트업으로 가는 자금줄도 가늘어졌다. 글로벌 VC 시장에선 테크 기업에 대한 가치평가가 박해지며 상장(IPO)이나 M&A가 어려워졌고, 증시에 입성한 기업들도 회수에 애를 먹는 분위기다. 중국계 VC 힐하우스의 경우 중국 정부의 ‘테크기업 때리기’에 실적이 크게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찌감치 투자 자산을 손절하는 사례도 나온다. 아마존 입점 브랜드를 사들이며 주목을 모았던 스라시오(Thrasio)는 데카콘(기업가치 10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국내 벤처캐피탈 시장의 분위기도 전만 못하다. 작년만 해도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등극이 무난해 보였던 기업들이 문턱을 넘지 못했고, VC 펀드 결성도 쉽지 않은 분위기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신규 투자는 688개사, 2조827억원이다. 전년 동기 604개사, 1조3187억원에 비하면 많지만 이는 지난 유동성 장세의 영향이다. 앞으로는 투자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소형 VC는 자금 걱정, 인력 걱정에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달 ‘스타트업의 파티는 끝났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불과 10개월 전 쿠팡 상장을 계기로 한국 스타트업 시장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던 것과 천양지차다. 여러 스타트업에 분산 투자하고 그 중 한 두곳만 큰 성공을 거두면 됐던 과거의 전략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지금의 경기 하강, 장기 불황 국면이 지속되면 VC 업계의 반등은 어렵다. 이에 VC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 분주한 모습이다.
일부 VC는 소규모 분산 투자 전략을 벗어나 바이아웃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VC 세콰이어캐피탈은 올해 초 아이돌 그룹 빅뱅 멤버 지드래곤의 누나 권다미 씨가 공동대표로 있는 한국 패션그룹 레어마켓 경영권을 인수했다. 유럽계 VC는 한국의 앱 콜렉터로 나섰다. 깐깐한 한국 시장에서 먹히는 서비스는 해외 시장에서도 도입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VC가 수익률을 높이려면 레버리지(차입금)를 활용하거나, 해당 산업의 가치 평가 배수(멀티플)가 높아져야 한다. 지금과 같은 금리 상승기엔 빚을 조달하기 부담스럽고, 멀티플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쿠팡처럼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물론, 돈을 벌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기대도 박해졌다. 벤처 투자로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바이아웃 거래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이익을 거두겠다는 인식도 생겨난다. 거품이 덜 빠진 비상장 시장보다 상장 기업에 눈을 돌리는 분위기도 있다.
PEF도 최근 먹거리를 찾기 위해 전략을 다양화하고 있는데, 대규모 자금을 활용해 점차 초기 투자 시장으로 가고 있다. 국내만 해도 최근 PE들이 괄목할 수익을 거둔 것은 하이브, 야놀자 등 벤처 성격 투자였다. 마찬가지로 VC도 웬만한 PEF 이상의 펀드를 결성해 M&A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몇해 전부터 VC와 PEF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지만 이 같은 현상은 갈수록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 VC 투자사 관계자는 “전세계적으로 VC 시장의 멀티플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단위 금액을 키워 바이아웃 거래에 나서는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며 “아직도 비상장 회사의 가치가 상장사보다 높게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보니 오히려 상장사에 투자(크로스오버)하는 경우도 있다”고 람했다.
VC들이 PEF가 즐겨 사용하던 사모부채펀드(PDF)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초기 지분 투자로 막대한 회수 이익률을 기록하기는 어려워졌지만, 본업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스타트업에 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투자하면 극적인 성과는 아니라도 평균 이상의 수익률은 기대할 만하다. 최근의 고금리 환경이 ‘채권성 투자’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에선 유수의 VC들이 이미 부채펀드를 활용하고 있다. 스타트업은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데, VC들은 한 두 차례 시리즈 투자를 받아 최소한의 성장성을 인정받은 기업들에 대출성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대출이니 원금과 이자가 기본적인 수익이다. 다음 시리즈 투자 유치 가치가 일정 수준 이상이면 금리를 높여받는 방식으로 구조화하면 추가 이익도 기대할 만하다는 평가다. 세콰이어의 경우 안정적인 운송, 에너지, 통신 등 영역에 투자하는 인프라스트럭처 부채 펀드도 운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차등의결권이 있어 투자유치 시 창업주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제도가 입법화되지 않았다. VC가 대출성 자금을 투자하면 스타트업 창업주는 지배력을 유지하면서도 기업의 성장을 꾀할 수 있다. 이에 국내에서도 부채펀드 활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한 금융투자업계 임원은 “대출 펀드를 활용해 투자하면 스타트업 오너의 지분율 희석 문제를 피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성장성이 입증된 기업에 투자할 경우 손실 위험성도 크지 않다”며 “미국 등 해외에서 부채펀드가 유행하고 있어서 국내에서도 도입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VC 업계에선 자산 장기 보유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VC는 상대적으로 PEF에 비해 투자 및 성과 도출 시기가 짧았지만 이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큰 성과를 낼 기회가 줄었다면 ‘될 성 부른’ 포트폴리오를 가능한 오래 안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한앤컴퍼니가 컨티뉴에이션펀드를 활용해 쌍용C&E 장기 보유 체제를 구축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캡스톤파트너스는 지난 3월 국내 VC 최초로 자산유동화 펀드를 설립했다. 작년 만기가 임박했던 3호벤처투자조합에 남아 있던 포트폴리오 전량을 새로 결성한 펀드에 넘겼다. 3호조합에는 직방, 왓챠, 마이리얼트립 등 유니콘 성장 가능성이 큰 포트폴리오가 남아 있는데 이를 새 펀드에 넘김으로써 추가 이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