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센터 내 연구원 주관적 의견에 불구하지만
그룹 계열사 삼성證 리포트라 공교롭다는 반응 多
국내 증시 기둥뿌리 뽑히는 격…실현 가능성 낮아도
최근 美 요구 등 '지경학' 변수로 혼란스럽단 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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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SK는 인텔의 낸드 부문을 인수한 뒤 솔루션 부문의 미국 상장을 시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분사하고 이를 미국에 상장하는 것은 어떨까?"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에서 지난 8일 발간한 '지경학(Geo-economics) 시대와 반도체' 리포트의 한 대목이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분사설은 주로 TSMC처럼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 측면에서 거론돼 왔다. 세트 사업과 칩 설계, 파운드리까지 다 갖춘 삼성전자가 팹리스 고객사 확보에 불리하지 않겠냐는 얘기다. 실제로 TSMC 견제 차원에서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를 함께 찾는 팹리스는 퀄컴과 엔비디아 정도다. 최근 고객사가 세 자릿수를 넘겼다고 하지만 삼성전자 파운드리 매출의 대부분은 아직 내부의 시스템LSI와 퀄컴, 엔비디아가 차지하고 있다.
리포트에서 언급된 분할·상장 얘기는 인력 확보 측면에서의 제언에 가깝다. 지난 수년 동안 수시로 오르내렸던 파운드리 분사설과는 결이 다르다.
▲결국 반도체 경쟁력의 기본은 인력인데 ▲인력을 효과적으로 확보하려면 충분한 보상이 필요하고 ▲국내 증시에 상장한 반도체 기업 주가는 할인이 불가피하니 ▲파운드리를 분할, 나스닥에 상장시켜 유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맥락이다.
워낙 시장에 미칠 영향이 큰 아이디어다 보니 리포트의 본 주제 대신 '나스닥 상장' 관련 대목만 주목을 받고 있다.
우선 다른 증권사 아닌 삼성증권에서 이 같은 의견이 나왔다는 점에서 찜찜하다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당연히 리서치센터 내 담당 연구원의 주관이 담긴 의견의 하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무엇보다도 분할 상장 의견은 리포트 본 주제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거 몇몇 상장사가 증권사 리포트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례도 있도 국내 증시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갖는 무게감이 크다 보니 이런저런 짐작이 오간다.
리포트 발간 이후 다수 언론이 '삼성증권의 도발적 의견'으로 조명하며 마치 삼성그룹 금융 계열사가 삼성전자 핵심 사업의 나스닥행을 조언하는 모양새가 된 측면도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UBS 출신 임병일 부사장을 사업지원 TF에 합류시킨 것과 삼성증권이 이재현 전 골드만삭스PIA 대표를 IB부문장으로 영입한 것까지 덩달아 입방아에 오른다. 실제로 임 부사장은 삼성전자에서 직접 발탁해간 인사 사례로 거론된다.
삼성증권이 IB 조직 개편과 맞물려 잇따라 글로벌 IB 출신 외부인사를 영입한 것을 두고 파운드리 분할·상장 가능성과 연결 짓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 삼성전자가 진짜로 파운드리를 나스닥에 상장시킬 거라 가정해도 이를 계열사라는 이유에서 삼성증권 IB에 맡길 가능성도 낮다.
증권가에선 리포트에서 나온 것처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업부를 분할해 나스닥에 상장할 경우 국내 주식시장의 기둥뿌리를 뽑아가는 꼴이라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정부 당국 차원에서 이를 용인해 줄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적지 않은 국내 그룹사가 계열사 성장 사업을 분할해 나스닥에 상장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지만 실현된 적이 없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나스닥 상장을 검토만 하다가 결국 코스피를 택했다.
최근 국내 증시의 쪼개기 상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감안하면 더욱 현실성 없는 얘기로 비친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한때는 코스피 시장에 모자회사가 동시상장하는 것보다 나스닥에 보내 순자산가치(NAV) 할인율 이상의 밸류를 인정받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리도 있었지만 지금 국내 증시에서 사업부 분할은 무조건 악재로 받아들여진다"라며 "삼성전자 주가의 성장 잠재력에 해당하는 파운드리를 나스닥으로 보낸다고 하면 국내 증시엔 껍데기만 남긴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반도체 동맹과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럽단 반응도 있다.
이미 국내 기업을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 상당수가 미국의 대중 견제로 인한 시장 위축을 감내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선 미국의 요구대로라면 중국 시장을 포기하고 미국 현지에 증설하며 전체 반도체 시장이 수십조원의 추가 비용을 물어야 할 것이라 추산한다. TSMC와 삼성전자 파운드리도 원가 경쟁력에 불리한 것을 감내하고 미국 현지에 신공장을 건설 중이기도 하다. 삼성증권 리포트의 핵심 주제 역시 지경학 변수로 인한 반도체 시장의 근본적 패러다임 변화를 다루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최근 3나노미터(nm) GAA 공정에 먼저 돌입했다고 발표하는 등 여론전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보니 괜히 더 이런저런 시나리오가 신경쓰이는 것 같다"라며 "파운드리가 결국 팹리스 고객 확보로 승패가 갈린다는 점에서 미국 시장에 꼭 상장시켜야 하는 무슨 정치적 변수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