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들도 사정 고려…약정 있어도 조율 가능성
자금 급하지 않으면 무리하지 말자는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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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 윤수민 기자)
싸늘하게 식은 자본시장 상황 속 투자자들이 엑시트(투자금 회수) 시점을 미루고 있다. 당초 기업공개(IPO)나 매각 등 엑시트 계획을 잡아뒀다가 예상보다 빠르게 가라앉는 시장 분위기를 감안해 대체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당장 자금사정이 빠듯하거나 재무적 투자자(FI)와 맺어둔 약정 탓에 매각이나 상장을 고려하는 기업도 있다. 다만 최근 쏘카 등 상장 기업들이 고초를 겪은 탓에 FI들과 협의를 통해 일정을 조율할 가능성도 떠오르고 있다.
1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국내 공유오피스 회사 패스트파이브, 스파크플러스의 상장 작업이 잠정 중단된 상태다. 당초 이르면 올해 상장한다는 계획을 세워뒀지만 녹록지 않은 시장 상황에 관련 작업을 잠시 미뤄두고 기업가치 상승에 집중하는 상태다. 미래에셋벤처투자 등 공유오피스 기업에 투자했던 곳들도 상장을 잠시 보류하는 데 뜻을 함께한 것으로 풀이된다.
SK 계열사인 혈액제 제조회사 SK플라즈마 역시 이르면 올해 상장할 계획을 검토했지만 최근 회사채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 방식을 선택했다. 지난 7월 회사 설립 이래 처음으로 공모채 시장에 도전해 약 600억원 규모의 자금을 확보했다. SK플라즈마는 바이오 투자심리(투심)가 급속도로 악화된 데다 SK 계열사의 기업공개 일정이 줄줄이 밀리면서 사실상 상장 가능성이 낮아졌다. 이에 상장보다는 회사채를 통한 보수적인 자금 조달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 현대힘스 역시 당초 올해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하려던 계획을 잠시 보류해뒀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꾸준히 개선세를 보이며 수익을 내고 있는 만큼 당장 상장을 통한 신규자금 조달이 급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9년 현대힘스에 투자한 사모펀드(PEF) 제이앤PE 역시 볼트온(유사 동종회사 인수)을 통한 회사 가치 상승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상장 외에 매각이 미뤄지는 사례도 있다. 올해 초 닭가슴살 브랜드 아임닭을 운영하는 와이즈유엑스글로벌의 경영권 매각이 진행됐지만 현재 관련 작업이 잠정 중단된 상태다. 연기금, 공제회는 물론 주요 캐피탈사들도 금리 상승에 따른 여파로 자금 집행에 까다로워지면서 원매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투자파트너스PE 등 투자자들은 당장 회사를 팔기보다는 신규 임원 선임 등을 통해 재정비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물론 쏘카처럼 공모가를 낮추며 상장을 감행하는 사례도 있다. 새벽 배송회사 컬리 역시 지난 상반기 예비심사 청구를 진행하며 상장 작업을 진행 중이다. 2차 전지 소재 기업인 더블유씨피 역시 9월 상장을 앞두고 있다. 다만 이는 당장 회사가 대규모 투자금이 절실하거나, 투자자의 엑시트 기한이 임박한 데 따른 사례로 풀이된다.
FI와 맺어둔 상장 관련 기한이 다가온 경우라도 향후 시장 상황을 감안해 일정을 조율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약정과 관련된 일정대로라면 내년 상장이 자연스런 수순이지만, 공모주 시장의 침체가 지속된다면 상장을 미루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커머스 회사 11번가는 2018년 사모펀드(PEF) H&Q코리아의 투자를 받을 당시 5년 내 상장을 약속한 바 있다. 신세계그룹 온라인 통합법인 SSG닷컴 역시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어피너티) 등 FI 투자 유치 당시 2023년까지 상장한다는 요건을 포함한 약정을 맺어뒀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웬만하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상장을 시도하는 기업들은 많지 않을뿐더러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좋은 가격에 엑시트하기 어렵다는 컨센서스(공감대)가 있어 무리한 매각이나 상장을 추진하지 않는 것”이라며 “설령 FI와 약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적 계약의 영역인 만큼) 더 유리한 엑시트 시점이 있다면 조율할 여지도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