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아웃 신청하려 해도 채권은행서 반려하기도
올해 매출 줄고 금융비용 늘어…좀비기업 증가세
내년 지원안 끊길 경우 부실 폭발 본격화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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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도 부실기업이 늘지 않았고 은행들의 기업여신 건전성 관리는 잘 이뤄졌다. 표면상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지만 이는 정부 주도의 금융지원 효과일뿐 가려진 부실이 작지 않다. 올해 금융시장 불안으로 한계 기업의 자금조달은 더 어려워지는데 금융 지원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미루고 미룬 부실 현실화 시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20년 3월 정부는 코로나 위기에 대응해 대출 만기연장 및 상환유예 조치를 시행했다. 타격을 입은 기업도 당장 상환 부담이 없으니 생명 연장에 어려움이 없었다. 채권은행들은 여신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기업들에 후한 등급을 줬다. 정량평가가 낮아도 정성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정상기업(A·B등급)을 유지하는 곳이 많았다. 2019년 210곳이던 부실징후기업(C·D등급)은 팬데믹 이후 오히려 줄었고, 회생절차 신청 건수도 크게 감소했다.
겉으로는 기업 부실 관리가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올해부터 기업들의 실적 하락세가 본격화하고, 시장금리 인상 등 금융시장의 불안정성도 커지고 있다. 정부 지원에 가려 있을 뿐 기업이 결국 부담해야 할 실질 부담은 늘어나는 상황이다. 은행빚은 차치하더라도 돌아오는 회사채 만기를 대응할 방도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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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워크아웃(채권단 주도 재무개선작업) 등 자구책을 찾으려는 기업이 점차 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업이 원한다고 워크아웃을 바로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채권은행들은 보통 매년 4~5월에 전년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기업등급을 산정한다. 이때 B등급 이상으로 평가한 기업이라면, 다음 정기평가 전까지 C 이하 등급으로 내리기 쉽지 않다.
은행들이 오히려 위험 기업을 만류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이왕 정상기업으로 평가했으니 시장에서 최대한 자구 노력을 해보라 권유하기도 한다. 혹여 회사채 상환이나 차환에 실패해 기한이익상실(EOD) 상태가 되더라도 현 등급을 유지시키고, C등급 이하로의 평정은 내년에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 구조조정 업계 전문가는 “한 기업은 C등급을 받아 워크아웃을 신청하려 했지만 B등급을 줬던 채권은행에선 정상기업인데 왜 그러느냐며 만류했다”며 “해당 은행에선 기업이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막지 못하더라도 현재 등급은 유지시키고 내년 평가 때에나 다시 조정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부실징후기업에 대한 은행권 신용공여는 작년 9월말 기준 1조원에도 미치지 않는다. 국내 은행들의 덩치나 재무 여력을 감안하면 큰 부담이 되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C·D등급이어야 할 기업들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 위험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은행들은 새출발기금 등 '빚탕감 정책'에 대한 부담이 많은 상황이다.
'좀비기업'이라 불리는 한계기업(이자보상배율이 3년 연속 1미만인 기업) 수치에서 잠재 위험이 현실적으로 드러난다. 이달 KDB미래전략연구소가 낸 ‘한계기업 현황과 시사점’ 리포트에 따르면 2011년 1353곳이던 한계기업은 작년 4478곳(중소기업 1225곳→4288곳)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한계기업 비율은 10.2%에서 18.3%로 올랐다. 지원이 끊기거나 외부 충격이 이어진다면 언제든 부실기업이 될 수 있는 곳들이다. 은행들은 충당금을 충분히 쌓았다지만, 감독당국은 부족하다며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대출 만기연장 및 상환유예 조치는 벌써 네 차례 연장돼 9월이 시한이다. 정부는 지난달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 운영 시한을 9월에서 내년 3월까지로 연장하고, 매입 한도도 늘리기로 하는 ‘회사채·기업어음 시장 안정을 위한 지원 방안’을 냈다. 이들 지원책의 시한이 다가오면 또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 기한이 무한정할 수는 없다. 내년 3월 지원안이 종료된다면 그 이후엔 부실 기업들이 쏟아질 가능성이 크다. 일부 자문사는 그에 대비해 연내 구조조정 인력을 확충해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각종 기금이나 국책은행이 충격을 완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부 정책에 맞춰 적극 여신을 지원했던 국책은행들의 고민이 깊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국책은행들은 정부 시책을 따르느라 애먼 회사들에 돈보따리를 계속 안겼지만 이제는 잠재적인 폭탄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