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채와 더불어 '고금리' 채권 인기…'바벨형 수요'
불어난 존재감에…오히려 기관이 개인 수요 따르기도
마케팅 불붙은 증권사들…리스크 우려에 "선별적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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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개인의 채권 순매수 규모가 10조원을 넘으며 시장 내 위상이 날라졌다. 국내 채권시장에서 개인 순매수가 10조원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채권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기관투자가들이 개인 수요를 추종하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제 2의 동학농민운동'을 기대하는 증권사들은 채권 상품 라인업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금융투자협회(금투협)에 따르면 올해 들어(8월 29일 기준) 장외 채권시장에서 개인투자자는 10조9918억원어치 넘게 채권을 순매수했다. 채권 유형별 순매수액 규모는 회사채가 4조8362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은행을 제외한 금융사 채권인 기타 금융채가 3조4641억원, 국채 1조4151억원, 특수채 6826억원, 은행채 1310억원 규모다.
최근 5년 동안 매년 개인의 채권 순매수액은 3조원 후반~4조원대 중반 수준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 개인이 채권을 순매수한 금액은 4조5675억원이었다. 올해는 한 해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금투협이 투자자별 채권 거래 자료를 발표하기 시작한 2006년 이전을 포함해 최대 규모다. 종전의 역대 최대 기록은 2007년 6조5143억원이다.
채권시장 전체로 보면 개인투자자 규모가 ‘시장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단순 수치만 보면 의미 있는 숫자란 평이다. 특히 올해 금리 불확실성 속에서 발행 부진, 운용 손실, 기관들의 투심 저하 등 잠잠한 채권 시장 분위기가 이어진 만큼 급증한 개인 투자자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개인투자자에는 ‘개인’들을 포함해 지방 금고, 신협 및 농협 협동조합 등 서민금융기관이 포함된다.
채권 개인투자자가 늘어난 데에는 쉬워진 투자 방법도 한몫했다. 급증한 관심에 증권사들은 M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에서의 채권 매매 편의성을 높였다. MTS에서 회사채와 신종자본증권 매매가 가능하고, 일부 증권사에선 해외 회사채도 매매가 가능하다. 물론 지점 등 오프라인 매매도 여전히 많지만, 증권사별로 모바일 거래도 수천억원 규모로 늘었다.
이에 힘입어 KB증권은 올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합해 리테일 채권 판매액이 10조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신한금융투자는 올 7월부터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카드채, 캐피탈채와 같은 금융채를 중심으로 한 원화채권 판매금액이 두 달만에 6000억원을 돌파하는 등 리테일 고객의 자금이 채권 투자로 유입됐다고 밝혔다.
개인의 채권 투자 이유는 ‘안정성’이 가장 크다. 원래도 채권 투자는 투자 포트폴리오에 필수로 포함되는 영역이었지만 저금리 국면에서는 예적금과 크게 차이가 없다보니 굳이 채권 투자를 늘릴 유인이 적었다. 그러나 금리 인상기가 도래하면서 채권 금리도 높아졌고 주식 등 투자가 ‘쉽지 않다’를 느낀 투자자들이 눈을 돌릴 만한 투자처로 채권이 급부상했다.
현재 제1금융권 기준 예·적금 금리가 연 3%대 후반인데 비해 A등급 채권의 이율은 연 환산 4~5%대에 달한다. 국채 금리가 최근 3.5% 수준으로 올라왔고, 4%대 후반의 신종자본증권도 다수다. ‘AAA’의 한전채 금리가 4%대를 넘어가는 등 고금리 매력이 커졌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개인 투자자 기준으로만 보면 꽤 의미있는 수치가 나오고 있다”라며 “주식시장이 횡보하고 있고, 부동산도 분위기가 식고 코인 시장도 무너지다보니 위험자산으로 가던 자금들이 안전자산으로 돌아오는 전체 ‘머니무브’의 큰 흐름 중 일부라고 본다. 금리인상기 동안에는 지속적으로 이런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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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인식하는 ‘영향력’이 크게 달라졌다는 평도 나온다. 원래 채권 시장에서 리테일은 규모가 작아 한계가 있었지만, 개인이 순매수 1위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 관계자들의 인식이 달라진 분위기다. 올해 기관 투심은 워낙 좋지 않아 일부 비우량 기업들은 발행 계획부터 리테일 물량을 염두에 두고 시장에 나오고 있고, 수요예측에서 미매각 난 건들이 모두 리테일로 소화될 정도로 개인 수요가 높은 상황이다.
개인들의 규모가 커지다보니 개인 수요 흐름이 오히려 기관들 수요에 영향을 미치고, 시장 분위기를 형성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금융사 후순위채에도 개인 투자 수요가 몰리는 등 여전사의 자금 기근을 개인투자자들이 해소하고 있다는 평이다.
개인투자자의 경우 통상 ‘우량채’를 찾지만, 투자 전략에 따라 만기가 짧고 ‘고금리’ 채권을 찾기도 한다. 증권사 리테일에서도 중간의 애매한 채권들보다는 아예 1~2년으로 만기가 짧은 기업어음(CP)나 만기가 긴 고금리 채권이 인기다. 크레딧 시장 전반에서 AA급은 기관수요가 있고, A-는 리테일 수요가 있지만 중간의 애매한(?) 등급 채권은 수요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관들 투심이 나아지긴 했지만 신규자금이 잘 안들어와서 여전히 투자를 못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기관들이 리테일 시장 움직임을 추종해 여전채 매수에 가세하는 분위기”라며 “통상 투심 나쁘다가 풀리면 등급이 높은 것들부터 풀리는데, 최근엔 기관들도 금리가 높은 채권부터 찾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채권 투자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2의 동학농민운동’을 노리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금융사들도 ‘채린이(초보 채권 투자자)’ 모시기에 분주하다. 개인의 채권 ‘직접 투자’는 기관투자가와 달리 금융사가 제공하는 상품을 통해 투자하기 때문에 각 사의 ‘채권 상품 라인업’이 중요하다. 보수적인 상품 선별을 하거나 상품군을 빠르게 늘리는 등 증권사별로 분위기는 다른데, 최근 한국투자증권과 삼성증권이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단 평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월지급식 채권 매각을 시작했다.
물론 동학농민운동의 ‘개미’들이 최근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듯, ‘채린이 열풍’이 해피 엔딩(happy ending)이 아닐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 과거 '동양 사태' 등 비우량 채권에 대한 시장의 트라우마도 언급된다. 다만 과거와 달리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는 우량채들은 사실상 위험도는 낮은 편이란 설명이다.
또 어느 정도 금리가 올라온만큼 앞으로 ‘더 오르든 내려가든’ 우선 사놓겠다는 투자자들도 많다. 전문가들은 채권 투자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투자 기간을 선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기’를 꼼꼼히 고려하고, 금리 상황 변화를 확인하고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증권사들도 혹여라도 생길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리스크 심사를 강화하는 등 조심스럽게 물건을 고르고 있다. 판매량만 고려하면 고금리 여전채 물량을 다수 확보할 수도 있겠지만, 위험도를 고려해 우량한 회사들만 선별하는 식이다. 예로 KB증권은 9월6일 발행 예정인 대한항공(BBB+) 회사채를 리테일에서 공급할 예정이다. 대한항공의 경우 신용등급이 낮지만 안정적 기업 실적과 업황 회복 등 사업안정성이 높다보니 투자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채권 물량을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기관들과 달리 개인들은 증권사를 믿고 상품에 투자하는 것이다 보니, A급 이하는 괜찮은 회사들만 선별적으로 조심스럽게 판매하고 있다”며 “회사별로 기준이나 시스템이 다르긴 하겠지만 (우리 회사는) 리스크심사부에서 선별적으로 판매 가능한 우량 채권들만 선별하기 때문에 비우량 후순위채 등은 아예 공급을 안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