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 회피하려 시행사 회생신청…기초자산 EOD에 ABCP 등급↓
지자체 확약물 경색 우려 확대…PF 채권 투자 망설이는 기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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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강원도가 '레고랜드' 프로젝트의 대출금을 사실상 갚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이 여파는 자본시장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사업 자금을 조달할 당시, 강원도는 해당 채무가 상환되지 못할 경우 직접 지급할 의무를 지는 '신용보강'을 해줬는데 올해 취임한 김진태 지사가 시행사 회생신청을 통해 이를 번복하면서다. 자본시장 내 '지자체 지급보증 채권'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증권가에선 정권 교체에 따른 정치권 이슈가 최근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불황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신용평가사 측은 지차제 주도 PF사업 중 레고랜드 파문과 유사한 건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모니터링은 이어갈 것이란 입장이다.
지난달 28일, 강원도는 레고랜드 테마파크 기반조성사업의 차주인 GJC에 대해 춘천지방법원에 회생신청을 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사업의 PF 대출에 신용보강을 해준 강원도가 사실상 채무 변제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프로젝트 재원 마련을 위한 위한 차입 구조는 다음과 같다. 강원도가 지분 44%를 보유하고 있는 GJC는 특수목적법인(SPC)인 '아이원제일차'로부터 2050억원을 차입한다. 해당 대출채무에 대해 강원도는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할 경우 직접 지급할 의무를 지는 '신용보강'을 해줬다. SPC는 해당 대출채무에 따른 채권 및 담보권을 기초자산으로 대출원금 상당의 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했다. 신용평가사들은 기초자산에 지자체가 신용보강을 해줬다는 것을 근거로 ABCP에 부도 위험이 가장 적다는 의미의 'A1(sf)' 등급을 부여했다.
문제는 지난달 29일 해당 ABCP의 대출만기일이 연장되지 않으면서 발생했다. 당시 ABCP를 발행해준 BNK투자증권은 만기일이 다가와도 강원도로부터 상환 관련 통지가 없던 까닭에 ABCP에 대한 3개월 차환발행을 고려했다. 계약상 강원도는 대출채권 중도상환을 위해선 차환발행 1개월 전에 BNK투자증권에 통보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가 GJC에 대해 회생신청을 할 계획을 밝히면서 SPC는 GJC나 강원도로부터 만기일에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했고 ABCP 상환에도 실패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일제히 ABCP의 적기상환에 대한 불확실성을 지적하고 있다.
강원도 측은 "강원중도개발공사가 지금까지 불투명하게 경영해왔다"며 "강원도민의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업회생을 신청했다"라고 그 목적을 설명했다. 법정관리인이나 새로운 인수자에 의해 GJC가 보유 자산을 매각한 대금을 바탕으로 대출금을 갚아나갈 것이란 설명이다.
이에 따라 결국 GJC에 자금을 빌려준 SPC인 '아이원제일차'는 최종 부도처리됐다. 신용등급도 최하단계인 'D'로 강등됐다. 29일 만기상환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C등급으로 강등된 지 일주일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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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 테마파크 건설은 최문순 전 지사의 '치적(治積)' 중 하나로 꼽히는 사업이다. 그러나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특혜 의혹이 제기됐다. 2013년, 2018년 두 차례 있던 협약에 수많은 독소 조항이 포함돼 있고 사업중단과 재개가 반복된 것이 그 배경이다. 김 지사는 강원도지사로 취임하기 전부터 레고랜드와 관련된 논란을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거론하며 "불의와 불공정을 강원도에서 뿌리 뽑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권의 적폐청산 후유증은 자본시장으로 넘어갔다.
우선 지자체가 신용보강해 준 유동화증권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유동화시장에서 지자체의 신용보강에 의한 유동화 회사는 30건(공시된 건 기준), 약 1.3조원 규모다.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들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 지차제 신용보강 유동화증권 신용도에 대한 우려가 빨리 사그라들진 않겠지만 당장 등급 변동이 필요한 건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향후 지자체가 신용을 보강해준 유동화 증권과 관련해 모니터링을 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지급보증을 약속한 강원도를 믿고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한 신용평가사를 비롯, 이를 믿고 투자에 나선 기관들은 사태 파악에 분주해졌다. 기관투자자(이하 기관)들은 지방 부동산 PF 유동화증권 투자를 망설이기 시작한 모습이다. 일부 기관들은 기존 투자 계획을 철회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증권사들도 투자 수요를 새로이 파악하려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일각에선 강원도 등 지자체가 주도하는 부동산 PF 관련 투자 건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도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그간 ABCP에 대해 건설사나 지자체가 지급보증을 해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보증 이행 여부 자체에 대한 신뢰가 하락할 우려가 확산될 경우 부동산 PF 업황이 추가로 악화될 수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정치권 이슈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부동산PF 업계가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라며 "자산매각을 통해 ABCP 투자자들이 변제를 결국 받을 테지만 레고랜드 사태 이후 지자체 신용보강 유동화 증권에 대한 낮아진 신뢰도를 회복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