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 M&A’ 고가 인수 논란에도 “현금 창출 자신, 적정가격 인수”
‘바이오·모빌리티·ESG’ 신사업 주축은 롯데지주·롯데케미칼
공개행보 잦아진 신유열…신사업이 승계 모멘텀으로 작용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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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의 행보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롯데는 수년간 웬만한 매물을 검토했지만 마지막 인수합병(M&A) 단계에서는 보류하며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롯데케미칼의 일진머티리얼즈 인수 등 바이오, 모빌리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영역을 신사업으로 점찍고 공격적인 투자행보에 나서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롯데그룹의 재무건전성 체력이 저하된 상황에서 주력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의 투자 부담이 그룹 전체 리스크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의 시선이 제기되고 있다. 신사업의 주축을 맡고 있는 롯데케미칼 일본 지사 상무 자리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 씨가 부임하면서 롯데그룹의 사업 확장이 신 상무의 승계 과정에서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유통과 석유화학에 주력해온 롯데는 최근 배터리 소재 등 신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롯데는 지난 5월 바이오, 모빌리티, 친환경 등 신사업과 기존 사업에 향후 5년간 37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신사업 확장에는 핵심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11일 전기차 배터리용 동박제조사 일진머리티얼즈를 2조7000억원에 인수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일진머티리얼즈의 전세계 동박시장 점유율은 13%(세계 4위)이며, 국내에서는 SK넥실리스(점유율 22%)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롯데케미칼은 경기에 민감한 기초유분제품 포트폴리오로 구성돼 있어 석유화학 업황에 따른 이익 변동이 크다”며 “롯데그룹이 그동안 M&A에 소극적이었던 사이에 SK나 LG는 이미 2차전지 산업에 진출하며 밸류체인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고, 롯데그룹 입장에서는 2차전지 사업에 ‘비싼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진출하자고 본 듯 하다”고 말했다.
고가 인수 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롯데케미칼이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를 사들인 이번 계약에서 주당 가치는 10만9852원이다. 계약 전일 종가(5만4000원)의 두 배로, 경영권 프리미엄이 100%에 달한다. 롯데는 지난 8월 본입찰에 주당 9만원 수준, 2조원 초반의 금액을 써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결국 처음 계획보다 7000억원을 더 들여 인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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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현 롯데케미칼 부회장은 향후 7~8년가량의 현금 흐름을 예측해 적정가격에 인수한 것이라며 반박에 나섰지만 시장의 판단은 달랐다. 인수 직후, 국내 신용평가 3사는 일제히 롯데케미칼의 신용등급 하방 압력이 커졌다며 재무안정성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NICE신용평가는 롯데케미칼을 하향검토 등급감시 대상에 등재하며 “2조7000억원의 대규모 자금이 추가적으로 소요되면서 향후 순차입금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최근 약화된 영업현금창출력과 동박 사업 확대를 위해 추가적인 투자가 지속돼야 하는 점 등을 감안하면 사업 다각화 효과가 유의미하게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이 7~8년 후 일진머티리얼즈의 현금흐름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본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동박 시장은 지난 수년간 기술경쟁이 마무리되며 본격적인 증설과 점유율 경쟁에 직면해있다. 고객사로부터 더 많은 물량을 받아오기 위한 가격 경쟁이 본격화되면 기존의 수익 전망 조정도 불가피하다. 경쟁업체인 SKC의 기존 공급계약 중 일부가 올해 말 끝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벌써부터 롯데와 SK의 치열한 고객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롯데케미칼 측은 일진머리티얼즈에 추가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시장과 시각 차이가 상당한 분위기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롯데케미칼의 입장과 달리 시장에서는 추가 자금 조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며 “동박 1만톤당 1000억~1500억원의 투자비 부담이 들어가는데, 일진머티리얼즈가 확충하려는 생산능력이 9만톤인 점을 감안하면 1조3000억원 수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진머티리얼즈의 연간 영업이익이 1000억원도 안 되기 때문에 자체적인 현금창출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게다가 롯데지주가 올해 코리아세븐 유상증자(3984억원), 롯데헬스케어 설립(700억원), 롯데바이오로직스 설립 등 신규 사업투자를 진행했기 때문에 롯데케미칼에 대한 자금 지원 가능성도 점쳐진다.
주력 사업인 롯데케미칼의 재무건전성 저하는 그룹 전체의 리스크로 확대되고 있다. 11일 NICE신평은 롯데케미칼과 함께 롯데지주도 신용등급 하향검토 대상에 등재했다. NICE신평은 “롯데케미칼이 롯데지주의 핵심 자회사이기 때문에 롯데케미칼의 신용도가 하락하면 지주의 계열통합 신용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롯데지주를 중심으로 바이오와 헬스케어 등 신사업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어 중단기적으로 그룹 전반의 재무부담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그룹 전반의 재무건전성이 약화된 가운데 신사업 진출 움직임은 신동빈 롯데 회장의 의지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신 회장은 지난 7월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꼭 필요한 일을 적시에 하라(Do the right thing, at the right time)”고 당부하며 기업의 체질 변화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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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선 롯데케미칼과 롯데지주가 신사업의 핵심 역할을 맡으면서 롯데그룹 승계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신 회장의 장남 신유열 상무는 노무라증권을 거쳐 일본 롯데홀딩스에 입사한 후 현재 롯데케미칼 일본 지사 임원으로 있다. 신 상무는 일본 현지에서 화학사업 부문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M&A 등 투자처를 발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 상무의 행보가 신 회장의 경영 승계 과정과도 비슷하다. 신 회장도 노무라증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일본 롯데상사를 거쳐 롯데케미칼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상무에 오르면서 경영 전면에 나서 그룹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신 회장의 베트남 출장에 신 상무가 동행하는 등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승계가 본격화됐다는 평가다.
신유열 상무가 몸 담고 있는 롯데케미칼의 그룹 내 위상은 더 커졌다. 지난해 롯데그룹의 매출 중 롯데케미칼의 비중은 33%에으로 유통사업 부문(27.5%)을 처음으로 제쳤다. 수소에너지, 배터리 소재 사업 등 신사업을 담당할 롯데케미칼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이어갈 계획이다.
일각에서는 롯데그룹의 신사업 투자가 그룹이 아닌 승계의 모멘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성장성이 높은 사업을 롯데케미칼에 붙이며 신 상무의 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M&A 거래에 좀처럼 이름을 올리지 않던 롯데그룹이 화학과 유통 등 주력 사업도 부진한 와중에도 그룹 전체의 재무건전성이 흔들릴 수도 있는 딜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 의문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