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옵션 결국 미행사...영구채 발행 철회한 탓
영구채 ‘안정적 상품’ 옛말…투자 신뢰도 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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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 윤수민 기자)
흥국생명이 최근 수천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영구채) 콜옵션(조기상환)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가뜩이나 얼어붙은 채권 투심에 미칠 부정적인 여파가 클 거란 관측이 나온다.
신종자본증권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실질 만기가 5년에서 10년으로 짧은 데다 금융사가 조기상환한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상품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흥국생명이 자본시장 내 암묵적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따라 앞으로 금융사의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이 지난 2017년 발행한 달러화 신종자본증권 가격이 15% 급락한 80달러선에 머물고 있다. 지난달 31일 흥국생명이 총 51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및 후순위채를 발행키로 했다가 이를 취소한 데 따른 영향이다. 이에 따라 차환이 어렵게 되면서 흥국생명은 2017년에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다.
이는 최근 금리 상승 영향으로 보험사들이 채권 발행에 애를 먹고 있는 데 따른 여파다. 재보험회사 코리안리는 최근 신종자본증권 발행금리를 6.7%에 확정했다. AA급 보험사의 신종자본증권 금리가 연 6%를 넘어선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흥국생명 등급이 코리안리보다 세 단계 떨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흥국생명의 발행금리가 이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통상 신종자본증권은 일반적으로 만기가 30년으로 설정되며 만기 연장의 횟수도 제한이 없다. 만기가 없는 대신 스텝업(Step-up) 조항에 따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금리가 올라간다. 이 때문에 발행사들은 금리 부담을 지는 대신 5년 또는 10년 후 조기에 상환할 수 있는 권리(콜옵션)를 갖는다. 즉, 이론상으론 만기가 없지만 자본시장에서는 조기상환이 ‘암묵적 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자본시장 경색 여파가 이어지면서 흥국생명이 이 같은 관행을 깼다는 평가다. 일각에선 최근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와 견주기도 한다. 앞서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지급보증을 해준 채권이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불거지며 채권시장의 불안정성이 가중된 바 있다. 금번 흥국생명의 결정 역시 비슷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평가다. 콜옵션 행사를 미리 약속한 뒤에 철회를 했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보험사 영구채 시장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금융사가 신종자본증권 발행 후 조기상환을 행하지 않은 것은 지난 2009년 우리은행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당시 우리은행은 높아진 금리 부담에 조기상환을 하지 않기로 했다가 금융권의 뭇매를 맞고 다시 차환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흥국생명이 십여년 간 이어온 신뢰를 깨면서 앞으로 보험사를 비롯한 금융사들이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거나 높은 금리를 지급해야 할 위기에 직면했다. 투자자들로서는 언제라도 흥국생명과 같이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는 금융사들이 또 나올 수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셈이다. 신종자본증권 발행금리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요구하거나 극단적으로 신종자본증권 투자를 꺼려하는 기관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신종자본증권은 개인들 사이에서도 수요가 많은 투자처로 꼽혀왔다. 지난 수년간 저금리 시기를 거치며 금융사 영업점에서는 안정적이면서도 연 3~4%대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신종자본증권 판매에 힘써왔다. 하지만 최근 흥국생명 여파로 개인투자자의 공포심리가 조성된다면 대규모 ‘투매’가 벌어질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보험사를 비롯한 금융사들은 최근 자본비율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신종자본증권은 유상증자를 하지 않고도 발행금액을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데다 명목만기와 상관없이 만기를 늘릴 수 있다. 일반 은행채보다 금리 수준이 높은 데다 스텝업 조항이 있는 만큼 기관투자자들도 선호하는 투자처로 꼽아왔다. 운용사나 공제회, 연기금 등도 금융사가 발행하는 신종자본증권은 투자 포트폴리오에 일반적으로 포함 시켜왔다.
한 채권투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자금시장에 레고랜드 사태 등 자금경색 국면을 맞은 시점에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 결정이 벌어진 것”이라며 “보험사뿐 아니라 은행 등 금융사 전반에 걸쳐 신종자본증권의 신뢰도가 하락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