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제로금리 유지…韓기업 사무라이본드 발행 재개
단순 금리차 노리기엔 비용 부담 커…엔화 필요성 의문
한일 관계 소원…우리 기업 일본 시장서 외면받을 수도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기업들은 유동성 축소, 각종 돌발 악재로 자금을 조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국내서는 조달비용이 계속 커지니 여전히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 눈길이 모아진다. 한국과 일본의 시장금리 차이만으로도 연간 몇 %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인데 실행 장벽이 낮지는 않다.
기업 입장에선 엔화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환전이나 헤지 비용을 감수하기 부담스럽다. 우리 기업의 엔화 조달은 우리 정부와 자본시장에 별 득이 되지 않는다. 일본 네트워크에 공을 들인 곳이 아니라면 일본 시장에서 투자 수요를 찾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일본은 물가 상승과 무역수지 악화 등 ‘나쁜 엔저’ 논란에도 윤전기로 돈을 찍어내겠다는 ‘아베노믹스’의 양적완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미-일 금리차가 엔화 가치를 계속 떨어뜨리고 있으나 기준금리 인상에는 미온적이다. 한국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보폭을 맞추면서 한-일 금리차도 더욱 벌어지고 있다. 금리차만 따지면 한국보다 일본에서 돈을 구하는게 조달 부담이 덜하다.
현대캐피탈은 10월 26일 일본에서 200억엔(약 1920억원) 규모의 사무라이본드(엔화표시 채권)을 발행했다. 1년6개월물이 0.98%로 0%대 발행금리를 기록했고 2년물(1.05%)과 3년물(1.21%)도 1% 초반대 금리로 발행에 성공했다. 하루 전 한국에서 발행한 1000억원 규모 2년물 발행금리는 6.023%였다. 단순 금리차만 5%포인트에 달했다.
신한은행도 10월 중순 320억엔 규모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했다. 2년물(0.87%)과 3년물(0.98%) 금리가 0%대였고, 5년물 금리는 1.33%였다. 10월 발행한 1년물 원화 채권들의 금리가 4.5% 이상이었으니 금리차가 3%포인트가량 나는 셈이다.
-
금융사가 먼저 일본 자금시장에서 성과를 거두자 일반 기업들에게도 기회의 땅이 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시장에선 한동안 존재감이 뜸했던 일본계 금융사들의 행보가 분주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롯데그룹은 최근 대형 M&A와 계열사 유동성 부족 등으로 자금 수요가 늘었다. 대형 금융지주들에도 크레딧라인을 열어달라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노무라, 미즈호 등 일본 금융사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 외에 포스코나 대한항공 등 일반 기업이 일본에서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한 사례가 있었다. 한국전력 등 한국 자금시장을 왜곡시긴 공기업들이 일본 시장을 찾을지도 주목된다.
시장 금리를 살펴보면 기업 입장에선 한국 시장보다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다만 일본 시장의 저금리 효과를 누리기까지는 따져봐야 할 것이 적지 않다.
기업 입장에선 일단 엔화가 필요해야 한다. 앞서 금융사들은 일본에서도 사업을 하기 때문에 사업비나, 기존 부채 상환 등에 엔화를 쓰기도 한다. 대한항공이 포스코 역시 일본 시장과 사업 연관성이 있고, 기존 엔화 회사채를 갚으려는 수요도 있었다. SK하이닉스도 일본 도시바메모리(키옥시아)에 투자하며 국책은행을 통해 엔화를 간접적으로 조달하기도 했다.
엔화가 아닌 원화나 달러가 필요한 경우라면 기업입장에서는 환전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신한은행과 같은 대형 금융사의 경우 환전비용이 미미한 수준이지만, 일반 기업들은 그보다 많은 비용을 들여야하니 엔화 조달의 실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환율 변동에 따른 헤지 비용도 감안해야 한다. 과거 한 광역자치단체에선 일본에서 철도 관련 제품을 수입하기 위해 엔화 채권을 찍었는데, 이후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상환 부담이 커졌다. 꾸준히 외화 소요가 있는 대형 금융사와 달리 일시적으로 외화가 필요한 일반 기업은 헤지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도 일본의 저금리 상황을 이용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서도 “대형 금융사와 달리 일반 기업들은 부수적인 비용 부담이 작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한국 자본시장 면에서 보면 우리 기업의 엔화 조달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과거 외화 시장이 불안해지면 정부가 나서서 외평채를 발행하거나, 당장 자금 소요가 없더라도 대기업을 해외 시장에 보내 달러화를 조달해 한국 시장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지금도 원달러 환율을 안정시킬 달러가 필요하지 엔화가 급한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일본 자본시장에서 환영받을 가능성도 크지 않다. 롯데나 신한은행은 일본 기반이 탄탄하고 현대캐피탈도 2005년 국내 최초로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한 일본통으로 꼽힌다. 이런 기업들조차 한-일관계 경색,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일본 시장을 두드리기 어려웠다. 일본 네트워크가 강하지 않은 기업들이 일본 금융사에서만 기대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 투자자 입장에선 굳이 한국 기업에 투자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 6~7%의 조달 부담을 져야 하는 기업을 일본에서 1%대 기업으로 만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투자자로선 금리로 재미를 보기 어렵다면 일본 국채를 사는 편이 안전하다. 혹은 우리 기업이 금리를 더 올려줘야 할 수 있다.
한 금융사 임원은 ““아직도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소원한 상황에서 일본 투자자들이 굳이 한국 기업에 투자하는 위험을 감수할지 의문”이라며 “금리 차가 없다면 한국 기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일본 국채를 사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