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유권해석 통해 보험사 RP 매도 길 터줘
RP 금리 상승 가능성 및 ‘미봉책’이란 한계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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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 윤수민 기자)
금융당국이 ‘흥국사태’를 둘러싼 자본시장의 날선 비판에 부랴부랴 ‘보험사 RP(환매조건부채권) 매도’라는 대응책을 꺼내들었다. 안일한 초반 대응이 채권시장 혼란을 부추겼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사태 진압에 나선 것이다.
일간 금융당국은 파장이 커지자 급히 유권해석에 나서며 당장 급한 불을 껐지만, 연말 RP 시장에 불거질 수 있는 유동성 경색 가능성은 여전한 부담이라는 평가다.
지난 10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한 간담회에서 흥국생명 콜옵션 미행사 사태를 둘러싼 업계 비판과 관련해 “강제적인 방법으로 하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흥국생명이 당초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조기상환) 행사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가 입장을 번복하는 과정에서 금융당국이 적극적인 개입이 쉽지 않았다는 점을 에둘러서 설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보험업법 규정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보험사에 대해 ①차환발행이 어려운 경우 ②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시 RBC(지급여력) 비율이 150% 미만이 될 경우 콜옵션 행사 승인을 내주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금감원측에 따르면 흥국생명이 사전에 콜옵션 미행사를 자체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행사를 하라고 압박을 가하기는 어려웠다는 주장이다. RBC 비율이 밑으로 떨어지더라도 상환을 하겠다는 민간 금융사의 강력한 요청이 있기 전까지 당국이 행사 여부에 직접적인 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 골자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이 2일 내놓은 입장문은 안일한 대처였다는 평가가 업계 안팎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흥국생명이 채무불이행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언은 결과적으로 국내외 채권시장을 둘러싼 불안감을 키우게 됐다.
결국 흥국사태가 발생한 지 엿새 만에 금융당국은 보험사 RP 매도라는 대응책을 부랴부랴 꺼내들었다. 첫 입장문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셈이다. 금융위는 3일 보험업권 간담회에서 제시된 보험사 RP 매도 방안과 관련한 유권해석을 단 며칠 만에 내주며 그간 전례가 없던 방식의 길을 열어줬다.
이 원장 역시 7일 “시장에서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에 대한 기대가 있는 점과 흥국생명 측의 자금여력도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흥국생명의 대주주 증자를 통한 조기상환 가능성을 시사하며 시장 불안감을 잠재우려 했다는 평가다.
이처럼 금융당국이 며칠 만에 입장을 번복하며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지만, 보험사 RP 매도라는 전례 없는 방식에 시장의 불안감은 잔존하고 있다는 평가다.
RP는 일정기간 후에 사전에 정해진 가격으로 다시 매도 또는 매수하는 형식의 거래로 일반적으로 금융사가 자체 보유하는 채권을 담보로 정해둔다. 거래 기간이 길어야 3개월로 초단기 거래 형태를 지닌다. 주로 증권사들이 자금조달의 방식으로 사용해왔고 시중은행이나 한국은행(한은)이 매수자 역할을 해왔다.
간혹 시중은행들도 단기 자금조달을 위해 RP 매도를 행하는 사례도 있다. 반면 보험사들이 RP 매도를 통해 자금조달을 하는 사례는 많지 않았다. 저금리 시대에서는 보유 채권을 판매하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데다 자체 보험금을 통한 유동성 확보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보험사들이 타이트한 유동성 상황을 맞은 데 따라 RP 매도라는 다소 생소한 자금조달 방식을 취하게 됐다. 보험업계 연구원들도 입을 모아 ‘처음 보는 사태’라는 관전평을 내놓았다.
아직까지는 흥국생명 한 곳만 RP 매도를 통한 자금조달을 하기로 했지만, 앞으로 신종자본증권 만기가 도래하는 보험사들이 다수 있는 만큼 연말 RP 매도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한 대형 운용사 채권 전문 운용역은 “당장 RP 금리가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보험사들이 선제적으로 RP 매도를 통한 자금조달에 나설 가능성이 충분하다”라며 “연말 RP 시장 금리가 수요 급증으로 오를 수 있다는 점은 리스크 요인”이라고 말했다.
통상 RP 매도는 공사채나 우량 회사채를 위주로 담보를 잡지만 RP 매도를 통한 자금조달 수요가 급증하면 담보물 요건 기준이 이전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RP는 안전자산을 기반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일종의 ‘유동화’ 수단으로 불려왔지만 그 기준이 높아진다면 통상적으로 RP 매도를 하던 주체들의 불만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운용역은 “증권사들이 주로 RP 매도를 해왔다고 해서 먼저 차입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며 “보험사의 수요가 몰리면 (증권사들로서는) 원하는 시기에 RP를 통한 자금 조달이 어렵게 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RP 매도는 길어야 3개월 정도의 자금조달을 위한 수단인 만큼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3개월 이후에는 갚아야 하는 자금인 만큼 모회사 등 대주주의 지원이 있지 않고서는 추후 자금조달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해석이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흥국생명 외에 다른 보험사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금조달을 하게 된다고 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기존에 움직였던 시장 방향과는 다른 모양으로 전개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