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재빠른 유권해석 및 보험사 의견 반영 한몫
향후 자본성증권 발행 시 보험사·은행 등 금리 부담↑
고금리 시기 셈법 복잡…유상증자 등 대안 마련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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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달 간 채권시장은 그야말로 대혼돈의 시기였다.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조기상환) 행사 여부를 두고 입장을 번복하는 과정에서 한국 채권시장은 대내외적으로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금융당국 역시 해당 사태에 대한 안일한 입장을 내놨다가 자본시장의 뭇매를 맞으며 부랴부랴 후속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번 사태로 금융사들이 즐겨 발행해 온 신종자본증권의 실질적인 의미가 재확인됐다. 관행으로 여겨졌던 ‘영구채=5년 만기 금융채’라는 인식이 이제는 감독당국에 의해 공인됐다. 고금리 시기를 접어들며 앞으로 보험사, 은행, 금융지주사 등의 신종자본증권 발행 트렌드 역시 변화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자본적정성을 맞추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해오던 신종자본증권이 시장에서 소화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연말부터 내년까지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시기를 맞는 보험사들은 모두 12개사로 약 4조5600억원 규모에 육박한다. 우선 올해 11월부터 연말까지 만기 시점을 맞는 보험사들은 푸본현대생명과 롯데손해보험으로 각각 발행액은 400억원, 900억원이다. 내년 1분기에는 DB생명(800억원), 푸본현대생명(600억원), 메리츠화재(1000억원), 한화생명(한화 약 1조4000억원) 등이 모두 콜옵션 만기 시한을 앞두고 있다.
같은 기간 은행과 금융지주 역시 6조원 이상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 시점이 순차로 돌아온다. 지난 2013년 하반기 은행들이 무더기로 10년 후 콜옵션 행사 조건 신종자본증권을 2조6000억원가량 발행했고, 지난 2018년 5년 후 콜옵션 조건으로 발행한 신종자본증권도 있다. 여기에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후순위채 약 4조원가량을 더하면 시장에서 소화해야 할 자본성증권이 10조원을 훌쩍 넘어서는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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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금융사는 대부분 관행대로 콜옵션 행사를 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푸본현대생명과 롯데손해보험은 모두 정해진 날짜에 콜옵션을 이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올해 연말부터 내년 말까지 가장 큰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만기를 앞둔 한화생명 역시 ‘대주주 증자 등 외부 도움없이’ 자체적 여력으로 조기상환을 진행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흥국생명과 DB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머뭇거리며 자본시장 내 비판이 거세지자 금융당국이 돌연 입장을 바꾼데 따른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금융당국은 지난 3일 보험사 간담회에서 ‘보험사의 RP 매도’와 관련한 건의사항을 듣고 단 며칠 만에 신종자본증권 상환을 위해 RP 매도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그간의 유권해석 사례를 감안하면 상당히 발 빠른 조치라는 평가다. 뿐만 아니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역시 흥국생명의 콜옵션 행사 결정 발표가 있기 직전 한 간담회에서 “시장에서 발행 시점 신종자본증권의 조기 상환에 대한 기대가 있는 점과 흥국생명 측의 자금 여력도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 볼 필요가 있다”라며 초기 대응과는 달라진 입장을 암시하며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금융위와 금감원이 서로간의 소통을 통해 이번 ‘흥국생명 사태’와 관련해 결론을 내린 셈”이라며 “시장 혼란 등을 잠재우기 위해 콜옵션을 행사하도록 하는 조치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본다. 앞으로 보험사들뿐만 아니라 금융사들이 신종자본증권과 관련해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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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금융사들은 신종자본증권 등 자본성증권 신규 발행을 두고 셈법이 복잡해졌다. 저금리 시기에는 은행 예적금보다는 조금 더 높은 금리를 원하는 리테일 투자자와 자본확충을 꾀하는 금융사들의 수요가 맞아떨어지며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봇물을 이뤄왔다. 하지만 이젠 기존에 찍어둔 물량에 대해 꼼짝없이 차환 발행을 해야 하는 부담 속에 신규 발행 시에도 높아진 금리를 감수해야 한다.
NICE신용평가에 따르면 자본증권에 대한 연간 금융비용은 올해 약 8200억원에 육박해 2017년 대비 5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기존 자본증권의 잔존만기를 감안하면 이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투자자 입장에서도 과거보다 신종자본증권에 투자할 유인이 떨어졌다. 금리 상승기를 맞아 5년 또는 10년이라는 만기가 더 길게 느껴지는 데다 상대적인 금리 메리트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기관 및 개인투자자들이 대부분 1~2년 정도의 단기 상품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라며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금리 탓에 5년 만기의 신종자본증권 수요도 과거와 달리 빠른 마감이 어려워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금융사들이 자본증권 발행 외에는 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한 대안 마련이 어렵다는 점이다. 대기업이나 금융지주 계열사들이야 ‘최후의 보루’로 모회사의 유상증자를 고려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금융사들은 사실상 기존대로 신종자본증권이나 후순위채 발행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 모회사가 있더라도 최근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대체로 비용 절감에 힘쓰고 있는 가운데 선뜻 대규모 자금지원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내년 금리상황 추이에 따라 자본성증권 발행 여건이 다소 나아질 수 있다는 낙관적인 예측을 내놓는 금융사들도 적지 않다. 어찌됐든 ‘흥국생명 사태’로 큰 산을 하나 넘겼기도 하거니와 금융당국에서도 자금경색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들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최근 신한은행도 4억달러 규모의 외화채권 발행에 성공한 점을 감안하면 그나마 ‘최악의 상태’는 지났다는 시그널로 생각할 수 있다”라며 “금리 인상 속도도 내년에는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고 공포 분위기도 다소 줄어들 가능성이 있어 내년 자본성증권 발행 수요가 계속해서 줄어들기보다는 반등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신용평가업계 한 관계자는 “내년 보험사들의 자본확충 필요성은 더욱 커지는 데다 대주주 지원을받을 수 있는 금융사들이 많지 않은 만큼 신종자본증권 신규 발행 수요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만 질적으로 우수한 자본 확충 없이 자본성증권 발행을 통해 규제자본비율을 관리하고 있는 보험사들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조달 비용을 감내하면서 수익성과 자본적정성이 낮아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