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자금 마르며 PEF '드라이파우더'에 주목
구조조정·크레딧 성격 PEF 찾는 기업들 늘어
투자 집행은 신중…"기다리면 수익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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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자본시장의 유동성 기근이 장기화하며 블라인드 사모펀드(PEF)의 위상이 다시 높아지는 분위기다. 금융사와 기관투자가 등이 위축된 상황에서 그나마 PEF만이 '쓸 돈이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이에 기업들의 PEF 자금 수요가 늘었는데, PEF들은 오히려 투자에 신중한 모습이다. 경제 환경이 악화하고 시장금리는 계속 오르는 상황이라 기다릴수록 기업들로부터 더 좋은 투자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블라인드 PEF 자금은 기업들에 있어 우선 선택지가 아니었다. 역대 최고 수준의 유동성 덕에 별다른 담보 없이도 저리로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증시 입성 문턱도 낮았다. 대형 기업이 아니라도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도움을 빌면 며칠 만에 수백억원을 모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투자 유치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심사 등 절차가 깐깐한 블라인드 PEF는 뒤로 밀렸다.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유동성 긴축 분위기가 1년째 이어지고 있다. 증권사, 보험사는 발이 묶인지 오래고 기업 자금의 최후 보루인 은행들의 부담도 커지는 모습이다. 회사채 시장은 각종 대책에도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자산운용사와 개인들은 지갑을 닫고 있다. 자금 조달처가 좁아진 기업들은 단기자금시장을 찾거나 자산을 매각하는 등 백방으로 뛰고 있다.
이에 블라인드 PEF의 자금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작년 기관전용 PEF가 새로 모은 자금은 역대 최대인 23조4000억원에 달했고, 올해도 주요 기관투자가들이 출자 사업을 이어갔다. 돈은 계속 풀렸는데 올해 투자 행보는 위축된 터라, 안 쓰거나 못 쓴 자금(드라이파우더)이 많다. 출자자(LP)들도 유동성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필요한 투자건이 있다면 나서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한 블라인드 PEF 운용사 관계자는 “시장의 유동성이 말랐다지만 블라인드 PEF에는 자금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며 “작년까지만 해도 기업을 찾아가 투자를 제안하면 ‘여의도 하루 돌면 수백원원 모은다’며 축객령을 듣기 일쑤였지만 올해는 먼저 투자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업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올해는 프로젝트 PEF 결성, 인수금융 조달이 모두 어려웠다. 제일 어려운 것은 프로젝트 PEF로 투자하면서 인수금융까지 일으키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넥스플렉스는 JCGI에 매각하려 했으나 프로젝트펀드 자금 모집에 애를 먹었고, 새 인수자로 나선 PEF도 인수금융 마련에 차질을 빚었다. 프로젝트 PEF를 결성해야 하는 곳은 경쟁입찰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어렵다.
반대로 블라인드 PEF를 가진 곳의 존재감은 커졌다. 글랜우드크레딧은 한화첨단소재 투자 거래에서 인수금융을 활용하기 어려워지자 블라인드 PEF들을 끌어들였다. SK온 프리 IPO는 프로젝트 PEF 결성 작업이 한창인데, MBK파트너스의 스페셜시추에이션펀드 참여 여부에 성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대형 거래가 아니라도 블라인드 PEF의 행동반경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구조조정이나 기업지원 성격 PEF, 운용의 폭이 넓은 크레딧 성격 PEF는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투자 요청이 밀려드는 분위기다.
다만 투자를 집행하기까지는 신중한 모습이다. 회사채나 은행 대출이 어려운 곳들이 메자닌 성격의 자금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 투자 위험성이 낮지 않다. 부동산 금융 시장 침체로 초기 브릿지론을 차환해달라는 요청도 많아졌는데, 이 경우는 해당 사업지의 개발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많은 LP들이 자금요청(Capitall Call)을 자제하라는 분위기라 GP 입장에선 옥석을 가리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아직 투자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시선도 있다. 경기침체가 이어질수록 기업들의 몸값은 낮아지고, 조건도 투자자에 양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시장금리도 앞으로 더 오를 여지가 있어, 기다리고 있으면 기업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는 수익률이 높아질 것이란 기대다. 유망 거래의 대출 금리도 10%에 육박하는 상황이라, 급한 곳들은 그보다 훨씬 높은 금리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한 구조조정 성격 PEF 관계자는 “최근 밀려드는 투자건을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아직 투자할 만큼 마음에 드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급해진 기업들이 금리(수익률)를 더 높여서 자금을 유치하려 할 것으로 보고 상황을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