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형 증권사의 초기 브릿지론 부담은 여전
본PF로 못 넘어가고 만기만 연장하는 사례도
자산 못넘기면 손실 확정…"버티기 국면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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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들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폭발한 유동성에 힘입어 호황기를 구가했다. 특히 부동산은 손만 대면 큰 돈이 됐다. 부동산 개발사업의 대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를 발행하고 신용보강(매입보장·확약)을 하는 과정에서 각종 마진과 수수료를 챙겼다. 몇 년 짜리 사업이라도 ABCP는 몇 달 단위로 차환되니 투자 수요를 찾기 어렵지 않았다.
올해 시장금리가 급격히 오르며 부동산 경기가 냉각됐다. ABCP를 발행한 특수목적회사(SPC)가 투자자에 자금을 지급하기 어려워졌고, ‘레고랜드 사태’까지 겹치며 단기유동화증권 투자 수요가 사라졌다. 고금리를 제시해도 시장의 외면을 받자 신용보강에 나선 증권사가 이를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일부 위험군 증권사들은 서로 상대의 ABCP를 돌려막아주기도 했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개입으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촉발한 유동성 위기는 점차 진정되는 분위기다. 지난달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이 발표됐고, 이번주엔 1조8000억원 규모 중소형 증권사 PF ABCP 매입 프로그램(제2 채권시장안정펀드)이 가동됐다. 산업은행도 대주주의 고통 분담을 조건으로 증권사에 크레딧라인을 열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가 PF ABCP 차환에 실패하거나, 연쇄 도산에 이를 것이란 우려는 전보다 줄었다. 그러나 앞단의 초기 사업비와 브릿지론 등은 잠재 위험 부담이 남아 있다.
국내 부동산 PF사업은 보통 시행사가 토지 매입 및 초기 사업비 용도의 브릿지론을 실행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인허가를 얻고 시공사를 선정한 후 건축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본PF가 실행된다. 브릿지론이 이 PF로 전환되는 구조다. 지난 몇 년간은 시장이 호황이라 이 과정이 문제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증권사들은 PF ABCP 발행 및 차환 과정에서 쏠쏠한 수익을 거뒀다. 다만 이는 시장의 파이가 커졌기 때문이고, 실제 마진율은 박했다. ‘대장동 개발’ 사업처럼 초기 시행 단계로 가야 적은 지분(Equity)을 대고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이 커졌다. 증권사가 돈의 힘을 업고 전문 시행업자와 건설사의 영역까지 파고든 것이다. 증권사의 부동산금융 위험노출액 중 브릿지론 비중은 30%에 육박한다.
제한된 자본으로 고수익을 내려는 중소형 증권사들이 특히 공격적이었다. 8월 한국신용평가 리포트에 따르면 대형사는 중후순위 브릿지론 비중이 약 40%인 반면, 중소형사는 70% 수준이었다. 중후순위 브릿지론은 부실이 발생하면 전액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돈 있는 대형사나 자기자본투자만 한 소형사보다, 자본력이 부족하면서 장외파생상품 등으로 외부자금까지 끌어쓴 중형사의 부담이 커졌다.
한 부동산 투자사 대표는 “증권사들은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시행사 건설사들이 주도하던 브릿지론 시장에 적극 진입했다”며 “돈의 힘을 앞세워 탐욕을 부렸지만 부동산 시장이 경색되며 발이 묵인 사례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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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부동산 개발 사업 초기부터 냉기가 감돈다. 사업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데 시장 유동성 고갈로 필요한 만큼 브릿지론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토지 매입 중도금까지는 지불했는데 잔금을 치르지 못하면, 그간 들인 돈과 사업 전부를 고스란히 날릴 처지가 된다.
브릿지론 단계에서 인허가와 토지매입까지 마쳤어도 본PF로 넘어가지 못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원자재값 상승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며 시공 건설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처음부터 시공사를 선정하고 시작했어도 본 사업으로 이어질 것이라 확신하기 어려워졌다. 본PF로 진행하지 못하는 사이 브릿지론 만기 압박은 커진다.
증권사 입장에선 활로가 생길 때까지 부담을 떠안고 만기를 연장할 수밖에 없다. 그 동안 부동산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었고, 최근엔 정부와 당국의 지원까지 업었다. 브릿지론까지 문제가 생기게 하거나 손을 벌렸다간 뭇매를 맞을 수 있다. ‘무이자 만기 연장’이니 사실상 손실이 나지만, 그렇다고 부도(EOD)는 아니니 정상 자산으로 잡힌다. 증권사에 알려지지 않은 잠재 부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막대한 성과급을 받던 시절은 지났고, 당분간은 부실 처리 부담만 이어질 상황이다.
한 투자사 임원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부실의 주체가 은행이라 손실을 적극 떨어냈지만 지금은 증권사나 저축은행이 문제라 손실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증권사들은 폭탄돌리기를 하며 버티면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외부에서 초기 사업자금을 받은 증권사는 투자자를 설득하는 데 진땀을 빼야 한다. 투자자 성화에 밀려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자산을 던지면 그 즉시 손실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무조건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 압박하기 부담스럽다. 돈을 돌려달라 성화인 투자자를 다른 투자자가 달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초기 자산이 급매로 나오거나, 다른 투자자들이 ‘줍줍’하는 사례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증권사 대표는 “본 PF로 넘어가지 못해 브릿지론 만기를 연장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초기 자산을 시장에 내놔도 받아줄 곳이 없으면 바로 손실이 확정되기 때문에 증권사들도 버티기 국면에 돌입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