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유동성 맞추기 위해 불가피한 결정
채권시장 안정화 구간 시그널도 보탬된 듯
다만 내년 크레딧 이벤트 가능성은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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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당국이 그간 시중은행에 자제하라고 당부해왔던 은행채 발행의 길을 다시 터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예금 유치만으로는 유동성 비율을 맞추기 어렵다는 판단과 더불어, 최근 채권시장이 안정화 조짐을 보이는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은행권에서는 빠르면 올해 연말부터 시장 기능을 통한 자금계획을 세울 수 있어 반색하는 모양새다.
지난 28일 금융위원회로부터 국내 시중은행 은행채 발행을 재개 가능성이 언급됐다. 이날 권대영 금융위 상임위원은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직후 “은행채 발행 방법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있고 연말에 은행들이 어려움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발언했다.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금감원장)이 거론한 ‘은행 간 은행채 인수 방안’에 이어 금융위가 내놓은 은행의 유동성 확보 관련 방안이다.
이는 그간 시중은행들이 조달금리 경쟁과 은행채 발행을 자제하도록 하는 당국의 권고와 관련, 줄곧 직간접적인 어려움을 피력한 데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그동안 금융 당국은 ‘레고랜드 사태’ 및 ‘흥국생명 사태’ 등으로 채권시장 혼란이 가중되자 은행들을 상대로 은행채 발행을 자제할 것을 권고해왔다. 지난 14일 은행권 금융시장 점검회의에서 시중은행들에 은행채를 통한 자금조달은 채권시장에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 카드사와 보험사 등 각종 금융사들의 유동성이 말라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상황이 나은 은행들의 협조를 부탁해왔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채권시장이 최근 점차 안정화되는 추세를 보인 데 따라 금융 당국의 입장이 다소 바뀐 것으로 분석된다. 현실적으로 은행 역시 유동성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한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24일 이복현 금감원장이 은행 간 은행채 흡수 등의 방안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시장에서도 이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이 대세라는 평이다. 최정욱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은행 간 은행채 거래 허용은 유동성 규제 비율을 준수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외부자금 조달 수요가 큰 현재 시중은행 상황에는 큰 보탬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시중은행들이 유동성 비율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은 지난 하반기부터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이미 IB(투자은행) 부문 관련 출자는 전면 중단된 지 오래고, 지난 3분기 직전 우리은행 역시 유동성 규제 비율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대다수의 은행들이 당장 금융 당국이 권고하는 규제 비율도 못 맞출 상황은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투자 건들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히 어려운 수준이라는 의견이 많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한 대형은행 인수금융팀에서는 출자하기로 했던 투자 건들도 거둬들이라는 윗선의 지시가 있었을 정도”라며 “시중은행이 IB 자금 조달 역할을 잠정 중단한지는 꽤 시일이 됐다. 은행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을 더 막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금융 당국의 은행채 발행과 관련한 주문이 일시적일 것으로 전망했던 시각들도 적지 않다. 수신금리 경쟁과 은행채 발행을 모두 자제하라는 권고가 사실상 시중은행으로서는 자금 확보의 길을 닫아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다.
한 대형 은행 자금담당 임원은 “은행의 기능이 조달과 운용 두 가지인데, 한도성 예신은 고객들이 언제 얼만큼 인출하고 예치할지 모르니 자금조달과 관련한 예측이 어렵다”라며 “그렇기에 은행들도 금융기관을 통해 시장성이 있는 은행채 발행으로 자금조달을 하는 것인데, 지금 당장은 당국에서 자제하라는 권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연말에는 다시 발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금리 상황이 차츰 나아지고 있다는 점도 금융 당국의 은행채 발행을 허용해주려는 움직임의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금리 수준이 차츰 안정화 조짐을 보이는 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역시 자이언트스텝에서 빅스텝으로 바꿀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국내의 경우 국고채 3년물 금리가 10월 말 4.18%에서 28일 기준 3.67%까지 떨어졌고 회사채 AA- 금리도 10월 말 5.61%에서 5% 아래로 내려간 상태다.
다만 신용경색 리스크를 넘어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자칫 은행채 발행을 재개했다가 전체 채권시장의 리스크를 높일 수 있다는 위험은 여전하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9월~10월 사이 채권시장 리스크에 일찌감치 북을 닫았던 기관투자자들도 올해 연말, 내년 초에는 다시 북을 열어 수요를 맞출 것”이라면서도 “내년 경기침체가 지속돼 흥국생명이나 레고랜드와 같은 크레딧 이벤트가 한번 더 온다면 다시 채권시장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