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모 KT 대표이사 연임 논란의 핵심은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반대표 행사를 시사한 근거와 명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금운용본부장(CIO)의 선임 이후 첫 메시지, 그것도 KT 이사회가 구 대표이사를 최고경영자(CEO) 후보로 선정한 당일 국민연금이 발표한 즉각적인 성명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국민연금은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이를 의결권 행사, 수탁자 책임활동 이행과정에서 충분히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KT는 구현모 대표이사를 연임 대상자로 선정하기까지 KT 지배구조위원회가 14명의 사외이사 및 13명의 사내후보자를 검토해 심사 대상자를 선정했고, KT대표이사후보심사위원회가 7차례의 심사 과정을 거쳐 구 대표를 최종 후보자로 확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절차적 투명성,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주주로서 당연한 권리 행사에 해당한다. 실제로 어느 후보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심사를 받았고,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에서 어떤 변수들이 작용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수많은 과정을 거쳐 공교롭게도 다수의 투자자들이 예상했던대로 구현모 현 대표이사가 KT의 차기 대표이사로 가장 적합한 후보로 선정됐을뿐이다.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고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추구하는 국민연금이 KT 이사회 결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포트폴리오 관리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시기와 방법이 투자자를 비롯한 다수의 이해관계자들에게 논란의 여지를 남긴 것은 명백하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인 주인없는 회사, 민간 기업이지만 정치권의 외풍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기업이 정권이 바뀐 후 처음으로 CEO를 선임하는데, 국민연금이 즉각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낙하산 인사의 예고', '찍어내기'란 오해(?)가 불거지는 건 당연하다. 일각에선 이미 국민연금의 과도한 경영개입으로 규정하고, 연금사회주의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했다.

국민연금의 이례적인 메시지가 적절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기금운용본부에서 담당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업들에 대해선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판단하도록 한다. 지난해 수탁위는 하나금융그룹 함영주 회장의 연임 주총을 앞두고 찬성표 행사를 의결했고,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등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에 참여했다. 

물론 KT 대표이사 연임 여부를 수탁위에 위임할 만한 사안인지 그리고 수탁위의 권한과 실효성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9명으로 구성된 수탁위 위원에도 포함하지 않는다. 메시지 발표의 주체가 서원주 CIO였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과 명분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물론 CIO가 목소리를 내거나 기금운용본부 차원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취임한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은 CIO의 독자적인 메시지("기금이사는 지난 27일 취임 인사 과정에서 말씀드린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입장임")는 KT와 꾸준한 소통을 통해 내린 기금운용본부 고민이었다고 보기엔 부족했다.

사실 이미 반대표 행사를 시사한 국민연금 그리고 KT 이사회도 난감한 상황이 됐다.

이제와 KT 측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론된 후보들과 선임 과정을 낱낱히 공개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다. 국민연금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표이사 후보 선임 절차를 다시 진행하는 것 또한 물리적인 시간이 충분치 않다. 또 다시 평가 절차를 거쳐 후보를 교체하는 것은 더 큰 리스크이다. 만약 새로운 경선 절차를 거쳐 구 대표이사가 또 다시 대표 후보로 추대된다한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향방이 바뀔지도 장담할 수 없다.

이번 KT 주주총회에선 구현모 대표이사 뿐 아니라 4명의 사외이사(윤경림, 표현명, 강충구, 여은정)의 임기가 만료한다. 구 대표 연임 논란이 이어지는 도중 사임한 이강철 사외이가까지 포함하면 총 6명의 이사진 교체가 예상된다. KT의 이사진은 총 10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주총을 통해 완벽히 새로운 이사진 진용이 갖춰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구현모 대표이사(사내이사) 외에 나머지 사외이사 후보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나타낼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KT 거버넌스의 논란이 지속하면서 조 단위 외부 투자유치 등과 같은 중요한 중요한 경영 활동의 결정도 기약없이 미뤄지고 있다. KT는 지난해부터 KT클라우드의 투자유치를 추진하고 있지만 경영진이 확정할 때까지 사실상 최종 결정이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이번 사태가 서원주 CIO의 취임 직후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한 기업 군기잡기에 그칠지 아니면 진짜 주인 없는 기업들에 대한 연금 개입의 시작일지는 지켜봐야한다. 당장 올해 주주총회에선 논란의 중심에 있는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임기가 만료한다.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의 사외이사 중 80% 이상의 임기도 올해 주총까지이다. 내년엔 정치권 외풍의 1번지로 꼽히는 최정우 회장의 임기 만료가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