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초기 2~3년 중요한데 작년 개점휴업 많아
LP도 투자해야…올해 자금 소진 압박 이어질 듯
글로벌 PE도 실탄 많지만…한국 성과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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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은 드라이파우더(미소진자금) 활용 압박을 강하게 받을 전망이다. 2021년까지는 유동성 풍년에 M&A 호황이 겹치며 펀드를 결성하고 자금을 소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작년엔 시장이 침체하며 투자처를 찾기 쉽지 않았다. 올해까지 투자를 머뭇거렸다간 출자자(LP)들의 눈밖에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운용사(GP)들은 적극적인 투자 행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국내 PEF 시장에선 2016~2020년 사이 연평균 14조원 수준의 자금 모집과 투자가 각각 이뤄졌다. 2021년엔 23조4000억원의 자금이 새로 모였고, 투자금도 27조3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수준에 달했다. 웬만한 운용사는 블라인드펀드 결성 시 1조원 규모를 넘볼 수 있게 됐고, 크레딧펀드 등 넘치는 유동성을 끌어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PEF의 약진에 2021년 M&A 시장도 역대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작년에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연초부터 불 우려와 유동성 긴축 정책이 이어지며 돈을 모으고 거래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논의를 시작할 때보다 기업가치가 폭락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선뜻 투자에 나서려는 곳이 없었다. 국내 연기금과 공제회, 금융사 등 LP 자금이 씨가 마르면서 운용사들은 약정해둔 블라인드펀드 자금을 달라 요청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앤컴퍼니의 SKC 필름사업부 인수(1조5950억원)처럼 조단위 거래도 있었지만, 이 외에는 5000억원 이상 거래도 드물었다.
많은 블라인드펀드들이 사실상 작년 한해 농사를 거른 셈이다. 펀드 결성 후 4~5년의 투자기간이 주어지지만 지난 몇 년간 추세는 초기 2~3년 동안 소진율을 빠르게 끌어올린 후 다음 빈티지 결성에 나서는 것이었다. IMM PE와 VIG파트너스의 4호 블라인드펀드처럼 상대적으로 일찍 만들어진 곳들은 작년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 이후 결성된 펀드들은 소진율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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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K파트너스는 2021년 두산공작기계, 일본 아코디아골프, 중국 에이팩스 등의 회수에 분주했다. 작년엔 카카오모빌리티, 메가스터디, SK온 등 투자에 공을 들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지난달 인수 계약을 맺은 메디트에 5호 블라인드펀드 자금 1조원을 쓸 예정인데, 그 경우 소진율이 40%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글랜우드PE도 작년 한글라스, PI첨단소재 등 투자 회수에 공을 들였다. 지금까지 우수한 회수 성적표를 거뒀는데, PI첨단소재는 막판에 판이 깨졌다. 글랜우드PE는 2호 블라인드펀드로 CJ올리브영에 투자했고 대부분 자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출자자들도 이제는 투자에도 보다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국내 출자자 입장에서도 올해까지 소극적일 수는 없는 상황이다. 작년이야 유동성 고갈 때문에 조심했으나 이제는 자금 시장 경색도 많이 풀리고 있다. 올해도 투자하지 않으면 몇 년 후 기록적인 수익률로 돌아올 기회를 내치는 게 된다. 작년에 위축됐을 뿐 결국 돈을 더 벌 수 있는 곳은 대체투자 쪽이기도 하다. 프로젝트펀드에는 여전히 출자를 꺼리지만, 이왕 있는 블라인드펀드는 소진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한 블라인드펀드 운용사 대표는 “출자자들은 투자는 않으면서 운용자산 규모만 늘려 관리 보수만 챙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며 “운용사 입장에서도 투자를 않고 있으면 LP들의 소진 압박을 받게 되고 다음 펀드 결성 등 활동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 PEF가 본격적으로 투자 활동을 나서기에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기업들의 가치가 낮아졌다지만 아직 만족스럽지 않고, 그나마 오는 투자 제안도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분위기다. 인수금융 역시 작년말의 ‘전면 중단’ 분위기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금융사들은 보수적이고 조달 금리도 높다.
그럼에도 LP들이 자금 소진을 독려하면 거래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수천억원 규모 블라인드펀드를 굴리는 한 운용사는 최근 한 제조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인수금융 조달 협상을 진행 중인데 금리가 10%를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블라인드펀드 자금을 활용해야 하니 비싼 금리를 감수하고라도 거래를 진행하되, 이후 리파이낸싱을 하거나 조기 상환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PEF들도 한국 안에서 블라인드펀드 자금 활용을 고민할 것으로 예상된다.
KKR은 2021년 150억달러(약 18조7000억원) 규모 아시아 4호 펀드, 작년 11억달러 규모 아시아 크레딧펀드를 결성했다. 칼라일그룹도 65억달러 아시아 파트너스 5호 펀드에 이어 작년 85억달러를 목표로 6호 펀드 결성을 진행했다. 베인캐피탈은 작년 20억달러 규모 스페셜시츄에이션 아시아 2호 펀드를 결성했고, 50억달러 규모 5호 아시아 펀드 결성에도 나섰다. TPG는 작년 34억달러 규모로 아시아 8호 펀드 1차 자금모집을 마쳤다. 지난해 EQT파트너스와 합병한 베어링PEA는 112억달러 규모 8호펀드를 갖고 있다.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을 두둑히 쌓아두고 있으니 대형 거래가 나올 때마다 자연히 글로벌 PEF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칼라일, TPG, 베인캐피탈 등은 작년말 한국 파트너 승진 인사를 단행하는 등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글로벌 PEF의 드라이파우더가 반드시 한국 시장에 쓰이게 될 지는 미지수다. 작년엔 한국 투자 포트폴리오의 자산 가치가 하락하거나 회수에 실패해 난처해진 사례가 많았다. 한국 시장이나 한국 파트너의 존재감과 영향력도 다른 아시아 지역보다 크지 않다는 평가다. 최근 메디트 M&A가 대표적인 사례다.
칼라일은 GS그룹과 손잡고 메디트 인수를 추진했지만 목전에서 놓쳤다. 아시아 펀드는 중국 담당 파트너의 영향력이 절대적인데, 메디트 거래에선 이 파트너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사의 승인을 얻기 어려웠고, 글로벌 유동성 경색으로 공동투자펀드 결성도 무산됐다. 이규성 전 대표가 물러나면서 한국 투자 동력이 약화했고, 김종윤 한국 대표의 영향력도 크지 않다는 평가다. KKR 역시 메디트에 관심을 가졌지만 칼라일과 LP군이 상당 부분 겹치는 터라 결과를 자신하기 어려웠다. 결국 빠른 의사 결정이 가능한 MBK파트너스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