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사업 부침 해소하기 위해 초저금리 입찰 불사하는 분위기
운용·리테일 등 타 부서가 간접 지원에 나서면 '이해상충'
-
회사채 시장은 원래도 발행사 우위 시장이었으나 최근 증권사들의 주관 경쟁은 누가 '슈퍼을(乙)'인지를 가리는 대전에 가깝다는 평가들이 나온다. 기업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거래를 따내기 위한 대형 증권사의 '제 살 깎아 먹기'식 영업이 시장 교란 행위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늘고 있다.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면 타 부서를 끌어들이는 정황도 보여 이해상충과 고객 보호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지난 9일 금융감독원은 금융투자협회, 국내 증권사와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 및 관행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고 GS건설이 회사채 발행 과정에서 협회 모범규준을 어겼다고 결론내렸다. NH투자증권이 주관한 GS건설 회사채 증액 발행 과정에서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 금리 산정이 있었다고 못 박은 것이다. 금융투자 업계에선 향후 유사 사례에 페널티를 부과할지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GS건설은 당초 1500억원 모집에서 개별민평 금리에 -30~+170bp(1bp=0.01%포인트)를 가산한 이자율을 제시했다. 주문이 몰리자 발행 규모를 2500억원으로 늘렸다. 목표 물량인 1500억원은 개별민평+140bp로 채웠는데 나머지 물량이 +140~170bp에 들어왔다. 모범규준에 따르자면 유효수요 최상단 금리인 개별민평+170bp로 청약을 진행했어야 했지만 주관사 NH투자증권은 140bp 가산한 수준으로만 추가 청약을 받았다. 금융감독당국에서 이를 문제화하는 등 논란이 커지자 증액 발행을 포기한 것이다.
증권업계에선 NH투자증권이 해당 발행사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 다소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모범규준을 어긴 NH투자증권에 비판의 목소리가 없지 않지만 경쟁 증권사에선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다. 다른 증권사가 주관 업무를 맡았더라도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지난 하반기 시장 경색 국면에서도 발행사의 무리한 요구가 쏟아졌는데 이를 외면한 증권사들이 해당 기업의 일감에서 배제된 사례도 있다. 채권 발행 외 일감이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주관사와 발행사 사이 기형적 관계가 한계에 이르렀단 푸념마저 나온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GS그룹은 범 LG가에 속하는 만큼 시장에선 NH투자증권의 캡티브 고객으로 통한다. 그럼에도 NH투자증권이 무리하게 요구를 따라준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라며 "현재 증권사들이 발행사에 좋은 인상을 남기고 기존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드러내는 장면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
투자시장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IB부문 부침을 해소하기 위한 대형 증권사 간 경쟁이 시장 왜곡을 부추길 거란 우려도 나온다.
미래에셋증권은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에서 번번이 가장 낮은 금리를 써내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리테일부서는 최근 신용등급 A-인 대형 그룹 계열사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개별 민평금리보다 71bp 낮은 금리로 입찰했다. 연초효과로 기관 수요가 몰리고 있다지만 A등급 회사채 인기가 떨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당 채권을 시세보다 비싼 값에 입찰한 것이다.
업계에선 미래에셋증권이 해당 발행사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 무리한 것 아니겠냐는 시각이 많다. 조달 금리를 획기적으로 낮춰주며 좋은 인상을 남기는 식이다. 이전까지 주관사들이 예상 발행 금리에 맞춰 기관 수요를 사전 파악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식으로 조달을 지원해온 것과 비교하면 위험한 방식이란 지적이 적지 않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그렇게 받아 간 물량은 시장에서 재매각하기도 어렵고 결국 계열 자산이나 리테일 시장에 녹일 가능성도 제기된다"라며 "시장 금리를 왜곡하는 문제도 있지만 증권사가 기업이나 개인 고객 자산을 굴린다는 점에서 위험성도 높다"라고 말했다.
다만 미래에셋증권은 "기관 주문이 들어온 만큼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낮은 금리로 입찰한 것으로 A등급 회사채는 높은 금리 메리트로 인해 꾸준한 수요가 있다. 수요예측 때는 하단 금리에 입찰했지만 금리가 정해지면 다른 기관과 같은 가격으로 사들이기 떄문에 비싸게 샀다고 볼 수 없다"라며 "법규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 싼 가격에 입찰한 것으로 시장 교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대형 증권사 사이에서 이 같은 영업 방식이 확산할 경우 이해상충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운용·리테일 등 타 부서가 IB 부문을 간접 지원하는 걸 넘어 계열 자산까지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지난 2021년 금융당국이 차이니즈 월 규제를 완화하며 증권사들이 자율적으로 원칙을 수립하고 사후 감독을 받게 됐지만 손실이 고객에 전이되는 등 금융사고가 발생하면 업권 전체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형 증권사 한 임원은 "증권업 전반을 취급하는 초대형 IB 입장에서 거래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숙명이긴 하나 손실을 감수하는 방식엔 회의적"이라며 "그렇게 손해를 감수하며 일감을 따고 수수료를 벌어봤자 결과적으로는 남는 게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