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서 촉발한 국민연금의 관치 경영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경영 개입?
의결권 행사 첨병, 수탁위 구성도 손 볼 듯
수익률 바닥, 전문성 결여에 기금위 이전 논의
돼지 냄새 발언에 정치권으로 비화
수익률 제고 논의는 사라지고 정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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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재계에서 '주연'이라기 보다 '조연'에 가까웠다. 국내 주요 기업들 대부분에 대주주 지위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국민연금의 의결권 방향 또는 주주로서 목소리가 반영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2018년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선언한지 5년, 국민연금이 재계의 주연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여느 정권에서나 마찬가지로 국민연금의 활용법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역대 17명의 이사장 가운데 임기를 모두 채운 인사는 단 3명(4대 조기욱, 9대 인경석, 13대 전광욱 이사장)에 불과할 정도로 정치권 외풍(外風)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자본시장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국민연금 최고투자책임자(CIO)의 손바뀜 과정에서도 최고의 '전문성'보다 '정무적' 감각을 요구받는다는 점도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 했다. 말만 무성한 연금개혁, 연금을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들을 차지하고 국민연금의 대(對) 기업의 칼이 그리 날카롭진 않았다는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정부의 '국민연금 칼'은 언제 어떻게 쓰일지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 다만 과감해진 국민연금의 행보에서 힌트를 얻을수 있는데, 최근엔 '관치(官治)' 또는 '연금 사회주의'라는 과격한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KT는 결국 7차례의 심사를 거쳐 선정했다는 대표이사 후보 지명을 철회하고 다시 공모에 돌입했다. 여권 출신 인사 18명을 포함한 34명의 후보가 대표이사 자리를 두고 경쟁을 펼치는 장관을 연출했다. 공모와 숏리스트, 최종 면접과 후보 선정까지 글로벌 기업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마식 보도가 이어졌다.
KT 사건의 발단은 취임한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서원주 국민연금 CIO가 ‘투명성’ 문제를 꺼낸 후부터이다. 대표이사 후보 사퇴를 이끌어 낸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서 CIO의 발언이 오롯이 본인의 메시지로 보는이들은 많지 않다. 이어 대통령실도 "주인 없는 기업은 공정하고 투명한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한다"며 힘을 실었는데 사실 이견을 가질 수 없는 명제이지만, 최근 맞물린 상황들 속에 결국 '낙하산 예고'로 비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이사 후보가 선임되자 정치권에서 이권 카르텔로 규정했다. 탁월한 외부 인사가 검증에서 탈락했는가? 대표이사로 선임됐더라면 임기내 팔순을 맞는 한 여권 후보가 독주하는듯 했으나 결국 이사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외풍이 심해지자 최근엔 사외이사, 계열사 대표이사 후보가 차례로 사임했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최근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이사회 구성과 대표 선임에 주주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라고 언론사 인터뷰에서 밝혔다. 주주가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주주자본주의를 표방하려는 의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국민연금이 기업을 향해 세밀한 주주권을 행사할만큼 전문성을 갖췄는지 그리고 주주로서 독립적인 의사 결정이 가능한 조직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KT에 대해선 이제껏 경영진 면담, 서한 발송, 주주 제안 등 수 많은 권리 행사가 가능했음에도 '투명하지 않다'는 CIO의 한 단어만으로 모든 절차를 갈음했다. 주주자본주의란 거창한 단어를 배제하고, 주주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요구하고자 한다면 이사를 직접 추천해도 무방하다. '연금 사회주의', '관치' 논란의 중심에 설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현재와 같은 애매한 자세만으로도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충분하다.
투자 기업이 '어련히 알아서 잘' 그리고 '깔끔하고 센스있게' 국민연금의 의중을 캐치해준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어물쩡한 태도로 일관하는 대주주의 모습은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키울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대주주인 기업들은 연금의 움직임에 눈치를 보며 오는 주주총회 시즌에 의결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선언하며 사외이사풀(POOL)을 만들어 추천하기로 했으나 여전히 구체화한 논의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올해 주주총회 시즌 역시 이사 추천과 같은 행동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의 가장 적극적인 주주권행사라고 해봤자 회사가 제안한 안건에 주총에서 '반대표'를 행사하는 정도다. 사회적 논란이 예상되거나, 찬반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안들에 대해선 국민연금은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는데 최근 들어 이 같은 권한을 애초에 포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만약 끝까지 경영권 분쟁이 진행됐더라면 캐스팅보트를 쥐게됐을 에스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민감한 사안들은 대부분 기금운용본부에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에 권한을 위임한다. 최근엔 이 수탁위가 도마위에 올랐다.
수탁위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늘 제기돼 왔다. 수탁위는 사용자, 근로자, 지역가입자 단체에서 추천한 상근위원 3명과 비상근위원 6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투자정책전문위원회, 위험관리·성과보상전문위원회와는 달리 기금위원이 포함돼 있지 않다. 이에 기금위원회는 비상근위원 가운데 3명을 전문가단체로부터 추천받아 자산운용 또는 책임투자 등 전문가를 선임하겠단 계획을 발표했다..
수탁위의 전문성 강화의 움직임은 바람직하다. 다만 최근 수탁위 상근 전문위원에 검찰 출신 인사를 선임하고 이어 사용자단체가 아닌 전문가 단체의 추천으로 민간 위원을 넣기로 결정하자 국민연금을 통한 정부의 기업 개입이 점차 노골화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사실 국민연금의 가장 큰 현안은 수익률이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연간 수익률은 마이너스(-) 8.22%로 80조원가량의 손실을 기록했다. 1999년 기금운용본부가 출범한 이래 최악의 성적표다. 투자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국내 한 공제회가 7년 연속 흑자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투자건에서도 국민연금과 KIC의 상반된 투자 행보가 눈에 띄었다.
수익률 제고만을 위한 논의가 이뤄져도 모자라지만 이보다 앞서 등장하는 논제는 기금운용본부의 서울 이전이다. 기금운용본부가 지방에 위치해 전문 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서울 이전이 시급하다는 논리는 일견 타당하다. 다만 이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불거진 '돼지 냄새 발언' 논란으로 인해 정치권 이슈로 비화했다.
연금개혁에 앞선 기금운용본부의 서울 이전 논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지자체의 반발을 넘어야하고 엮여 있는 수많은 정치권 인사들의 이해관계를 풀어야하며 마지막엔 여야 합의를 통한 법 개정까지 이뤄져야한다. 사실 정부의 관치 논란, 기금위 이전과 같은 논쟁에서 수익률 제고란 국민연금의 궁극적인 제 1의 목표가 흐릿해 지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