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평가손실과 부동산 자금시장 경색 등이 원인
당사자는 “회계에도 반영된 확정 월급” 반발하지만
회사와 금융 당국은 이연성과제도 강화에 한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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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변동성 확대와 레고랜드발(發) 부동산 금융 경색으로 증권사들의 경영 실적이 악화되자, 일부 부서들이 임직원 이연성과급을 미지급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주로 채권을 운용ㆍ발행하는 부서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대체투자를 전담하는 부서가 대상이다.
그간 회사의 추후 실적에 따라 이연성과급을 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존재는 해왔지만,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성과급을 받지 못한 임직원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23일 증권가에 따르면 국내 일부 증권사의 채권 및 부동산PF 부문 임직원들은 올해 지급될 예정이었던 이연성과급을 받지 못했거나 이연분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 부동산 PF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한 대형 증권사는 물론, 투자금융(IB) 역량을 부동산에 집중하던 모 중소형 증권사 등에서 이연성과급을 미지급 혹은 축소 지급하는 사례가 확인됐다.
차입 매도한 채권의 평가손실과 부동산 자금시장 경색,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회사 측이 이연성과급 지급을 보류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주식시장 거래대금 감소에 따른 투자중개부문 실적 저하와 더불어 부동산금융, 소송 등 관련 충당금을 적립해야 했던 것도 미지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성과보수 이연지급제도는 금융회사 임원이나 금융투자업무 담당자가 단기 실적에 매몰되지 않도록 성과 보수 40% 이상을 3년 이상 나눠 지급하게끔 의무화한 제도다. 금융위원회가 공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감독규정에 따르면 ‘금융회사에 손실이 발생한 경우 이연지급 예정인 성과보수를 손실 규모를 반영해 재산정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실제 손실을 이유로 이연성과급 규모를 줄인 사례는 거의 없었다.
한 대형 증권사의 부동산PF 관계자는 “미지급 조항이 있다곤 하지만 진짜로 FM(정석)대로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며 “부동산 대체투자 부서의 한 임원은 4년동안 누적됐던 이연 성과급까지 올해 미지급됐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A 증권사는 대부분의 부동산PF 사업에 중·후순위로 들어갔기 때문에 업황이 나빠지자마자 (이연분을 포함한) 성과급이 크게 줄었다”고 인정했다.
채권 발행·운용 부서의 상실감은 더한 모양새다. 이전까진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시장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고금리와 레고랜드 사태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실적이 악화되자 성과급 규모도 3~4년전 대비 큰 폭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중소형 증권사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급격한 채권시장 불황으로 DCM 주력 부서들은 이연분 성과급에서 결손이 났다”고 말했다.
한 금융지주계열 대형 증권사 역시 대규모 채권운용손실을 기록하며 관련 부서의 성과급을 크게 줄이고, 이연성과급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때문에 성과급 지급이 보류된 직원들 사이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증권사 실무자는 "이연성과급은 이미 회계상 부채로 반영된 내용"이라며 "이를 환수하거나 미루는 것은 확정된 월급을 뺏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지급 보류 상황을 두고 법적 분쟁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법무법인 태림 소속의 오상원 노동전문 변호사는 “(이연성과급을) 지급하지 않거나 환수했더라도 근거가 있고 이에 근로자가 동의했다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 대다수 판례의 입장이지만, 해당 조항의 내용과 형식에 따라서 미지급이 위법이라고 본 판례들도 있다”며 “회사의 임의적 미지급 건에 대해 다투는 소송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장의 목소리와는 달리 금융당국은 오히려 이연성과급 제도를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금융투자 담당자들이 단기 성과에 집착하다보면 투자자들에게 무책임하게 고위험·고수익 상품을 집중 판매하게 되고, 이로 인해 증권사들의 재무 건전성도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미지급 당사자의 불만은 금융인이 단기 시장의 위험만 부담하겠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며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성과보수 이연지급분의 ‘환수’규정이 아직 법적인 구속력을 갖추진 못한 권고 형태이기 때문에, 이를 제도화하려고 은행권 지배구조 개선 TF에서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대놓고 내색하진 않지만, 일부 증권사 경영진 역시 금융당국의 이연성과제 강화 행보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특히 부동산 관련 부서 소속 임직원들은 본부 혹은 부서 단위로 경쟁사에 이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핵심 인력을 잡아두기 위해선 성과급을 장기간에 걸쳐 지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린 까닭이다. 대부분의 금융사들은 ‘동종업계 이직 시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어, 이직 희망자는 이연 성과급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성과급을 받고 나서 퇴사해버리는 것은 경영 방해 요소로 간주된다”며 “성과급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되는 관리직은 경영에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는 게 이연성과제도의 취지고 이에 동의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