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입 보단 소각…자사주 활용한 환원책 증가
국민연금 경영 개입 시작…초유의 경영공백 사태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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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막을 내렸다.
올해는 행동주의 펀드 태동의 원년이라고 불릴 만큼 주주제안이 쏟아졌는데 실제로 투자자들에게 받아들여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점차 커지는 주주들의 목소리에 기업들의 주주환원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국민연금의 직간접적인 경영 참여의 과정에서 연출된 매끄럽지 못한 모습들은 재계의 긴장감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
올해엔 안다자산운용, 플래시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 트러스톤자산운용, 얼라인파트너스 등 주요 상장사를 상대로 주주 제안을 낸 곳이 과거에 비해 크게 늘었다. KCGI로 대표하는 국내 행동주의펀드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펀드들이 난립하는데에 따른 피로도가 상당히 크다는 지적도 나왔다. 어느덧 명분과 목표는 사라지고, 이익만 챙기고 수면아래로 사라진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사례도 SM사태에서 엿볼 수 있었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타깃으로 삼은 곳은 주로 지배구조가 취약하거나, 기업가치가 저평가 구간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받는 곳들이었다. 한마디로 주주들의 불만이 쌓여있는 기업, 폭발 직전의 기업들을 상대로 주식을 매입하고 주주제안을 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행동주의펀드의 노력이 단기적으론 주가를 부양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으나 직접 이사회에 참여해 기업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례는 드물었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주주환원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행동주의 펀드를 표방하는 운용사들이 늘고는 있는데 실질적인 기업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목표를 갖고 있는지는 주주들이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행동주의 펀드가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경영진 또는 이사회에 긴장감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점은 일부 긍정적인 요소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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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주의펀드가 촉발한 긍정적인 요인으로 꼭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올해 주주총회에선 기업들의 주주환원책이 과거에 비해 규모와 방식 측면에서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너를 비롯해 최고경영진들의 주가 부양 의지와 목표가 뚜렷한 그룹들이 눈에 띄었다.
SK이노베이션은 주주들을 상대로 공개매수를 실시해 SK온의 주식을 배분한다는 계획을 밝혔고, SK스퀘어는 3분기경 2000억원의 자사주를 매입하고 소각할 계획을 발표했다. SK㈜, 카카오, 삼성물산, 크래프톤 등도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차는 기말 배당금을 지난해와 비교해 50%가량 늘렸고, 1%의 주식을 소각하는 방안도 의결했다.
지배구조개편을 추진한 기업들, 즉 현대백화점과 OCI 등도 주주들의 부정적인 기류에 부랴부랴 자사주를 소각하는 주주환원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현대백화점은 국민연금 등 대주주의 반대에 부딪혀 지주사 전환이 무산됐고, OCI는 주총 안건 통과로 지배구조개편을 앞두게 됐다.
올해 주주총회 시즌엔 무엇보다 국민연금의 책임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국민연금은 SM의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보트를 쥔 주요 주주로 분류돼 왔는데 분쟁이 격화하는 시점에 주식을 대거 매도하며 대주주 지위를 내려놨다.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며 투자목적을 변경한지 불과 1년만이다. 과거 LG화학, 남양유업, 효성, 한진칼 등과 같이 민감한 사안이 발생한 기업들의 주식을 매도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주주권행사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같은 모습과는 달리 소위 주인없는 회사 'KT'에 대해선 유독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이사 선임 과정에 개입했다. 국민연금이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시한 구현모 전 대표이사의 낙마를 시작으로 윤경림 사장과 사외이사들의 후보 사퇴가 줄을 이었다. 심지어 현직 사외이사진들이 대거 사임하고, 연임 후보에서 사퇴하면서 초유의 경영 공백 사태를 맞게 됐다. 현재 KT의 이사진은 4명의 사외이사가 전부인 상태로, 이가운데 3명은 다시 열릴 임시주주총회에서 임기가 끝난다. 새로운 경영진이 꾸려질 때까지 KT의 경영공백을 불가피할 예정이다. KT와 얽힌 이해관계자들의 손실도 그만큼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 논란은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포스코그룹과 같은 공적자금의 지분이 높은 기업들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국민연금이 2~3대 주주로 주요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민간 대기업들도 국민연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경영 자율성을 저해할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