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자금 절실"…스타트업 업계 위기감 절정
옥석 가리기 속 알짜 기업 지원 방안 모색 움직임
메자닌·대출 등 다양한 방법…"해볼 건 다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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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얼어붙은 벤처 투자시장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규모가 작은 초기 스타트업 투자는 근근이 이어지고 있지만 후기 단계 투자는 씨가 말랐다. 몸값이 폭락한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들은 추가 자금 모집, 기업공개(IPO) 등을 미뤘다. 구조조정으로 비용 줄이기에 나선 곳도 있다.
벤처 투자 업계의 위기감이 절정으로 가는 가운데, 일각에선 "살릴 곳은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도 생기고 있다. 사업성이 좋지만 일시적으로 운영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곳은 이대로 사장시키기엔 아깝다는 것이다. 대출, 메자닌, 펀드 결성 등 다양한 구제방안이 거론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국내 벤처 투자 규모는 8815억원 수준이다. 전년 동기(2조2214억원) 대비 60% 줄었다. 해를 넘겨서도 유동성 기근이 이어지며 회수 방도가 흐릿해진 상황이다. 투자자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며, 기업들은 유동성 절벽을 마주하게 됐다.
그동안 유니콘 기업들은 사용자 수와 거래액을 늘리기 위해 마케팅비 지출에 열을 올렸다. 공격적인 확장으로 인건비도 크게 늘렸는데 지난해 유니콘 기업들 대부분이 실적이 악화했다. 비바리퍼블리카, 컬리, 직방, 리디, 당근마켓 등은 적자 규모가 전년도에 비해 커졌다. 야놀자, 두나무, 빗썸코리아, 오아시스 등은 영업이익 규모가 줄었다.
시장에서 플랫폼 비즈니스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 중개자로 수수료 챙기기에만 집중한 사업 모델은 매력을 잃었다. 외형 성장에 집중한 ‘계획 적자’ 전략은 쿠팡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챗GPT(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카카오식 확장’ 사례가 다시 나오기 어려워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벤처 기업들은 비상경영 모드다. 이제 투자자들은 무조건 ‘돈을 버는’ 회사에만 투자하고, 기존에 투자한 회사들에도 ‘돈을 버는’ 사업부만 남기기를 원하고 있다. ‘뭐라도 해보라’는 식으로 신사업을 독려하는 투자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이 안되는 신사업은 재가조차 해주지 않는 분위기다.
최근 토스(비바리퍼블리카), 직방 등 대표 유니콘들도 권고사직에 나섰다고 알려졌다. 로톡(로앤컴퍼니), 뱅크샐러드, 그린랩스, 메쉬코리아, 샌드박스네트워크 등 예비 유니콘들도 희망퇴직 및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일부 기업은 핵심 사업을 물적분할해 제2의 창업을 하려다 투자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경영진의 비위 소식도 잦아지는 분위기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경영진들이 투자금 유치하러 다니느라 바쁘다보니 본업 경쟁력은 더욱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만큼 비즈니스 모델이 약하다는 것인데, 그동안 많이 쏟아부은 투자금을 겉치레식 마케팅에만 쓰면서 사업 경쟁력은 확보 못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벤처 호황으로 기업가치가 과도하게 책정되는 등 ‘거품’도 분명히 있었다. 경쟁력 없는 기업들은 정리되는 과도기를 맞이했다는 공감대도 분명하다. 다만 이대로 벤처 투자 시장을 위축되게 놔둬서는 안된다는 위기감도 고개를 들고 있다. 한 번 시장이 쪼그라들면 다시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태펀드 등 정책 자금도 집행 성과가 부족하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효적 사업이 있고,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을 지원하려는 고민들이 나타나고 있다.
벤처기업 전문 대출(Venture Debt)을 활용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는 분위기다. VIG파트너스의 크레딧투자부문 VIG얼터너티브크레딧(VAC)의 마이리얼트립 투자가 대표적이다. VAC는 작년 사모신용펀드(PCF)를 통해 마이리얼트립이 발행한 500억원 규모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인수했다. 이전까지 국내 벤처 투자업계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구조화 투자란 평가다. 최근엔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에이블리가 벤처 대출을 받았다. 조달 금리가 10%에 육박했지만 유동성 위기는 넘겼다. 회사는 지난달 매출과 거래액 증가로 월간 기준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작년부터 벤처 대출 활용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며 "대출이 가능한 곳은 지분투자(Equity)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투자자는 내돈을 빚을 갚는다는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조율해야 하느냐 문제가 남느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자산을 담보로 한 대출도 고려할 만하다. 실물 자산이 많지 않은 벤처기업들은 거래 데이터 등 정보를 활용할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있다. 산업은행은 2021년 1월 금융권 최초로 데이터담보 대출을 실행했다. 데이터와 애플리케이션(앱)을 담보로 제공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혁신기업 특별 대출제도로, 그 규모가 1년 만에 1000억원을 넘긴 바 있다. 번개장터가 대출 고객이고, 컬리도 이 대출 활용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인 데이터를 활용한다는 부담, 데이터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있다.
PEF와 VC 등 투자사들도 위험은 최소화하고, 투자는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기업이 위기를 겪을 때 나서면 적은 자금을 투자해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기관투자가(LP)들의 출자사업에 '위기 벤처기업 지원' 주제로 지원하려는 곳들도 있다. VC들은 자금 위기인 스타트업들에 대출을 내주고 노무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최근 권고사직 등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는 스타트업들이 많다 보니 회사와 직원들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등 전문 VC도 노무서비스 강화 목적으로 노무사 채용에 나섰다.
‘정말 위험한’ 기업들 대상으로는 최후의 보루로 임금채권을 담보로 대출하는 것도 한 방안으로 꼽힌다. 우리사주조합이 주체로 나서는 대출인데, 상황이 나아지면 우리사주가 투자사 지분을 매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회사 매각 시 받을 위로금이 담보로 잡히다보니 내부 반대가 만만치 않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투자자 입장에선 정말 힘든 기업들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건 다 해보자는 차원에서 임금채권 활용, 조직슬림화 등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