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 육성 뒷받침할 '과거 산업'의 부진 장기화
케미칼은 대규모 투자 부담, 쇼핑은 게걸음 행보
재무부담 핵심 롯데건설, "아직 위험 잠재" 지적
복잡한 지배구조 부담, 유동성 확보도 수월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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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수년간 "과거에서 탈피하라"는 메시지를 던져 왔다. 헬스케어, 모빌리티 등 신사업이 자리잡기까지 유통, 화학 등 기존 주축 사업이 자금줄 역할을 해야 하지만 대부분 경기 침체와 실적 부진에 고전 중이다. 롯데건설에서 촉발된 그룹 유동성 위기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자금 조달처 다양화, 비주력 사업 정리도 녹록지 않은 분위기다. 체질 개선 과정에서의 투자 행보, 과거 사업의 부진이 당분간 그룹 전반을 짓누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롯데그룹은 여러 해 동안 부진과 불운을 겪었다. 2017년 중국의 사드 보복 이후 해외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듬해는 총수 부재로 방향성 설정에 애를 먹었다. 2019년 일본과 무역분쟁이 본격화한 후엔 ‘일본 기업’ 프레임에 시달렸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룹 전반의 부진이 이어졌다. 위기감이 절정으로 치달으며 신동빈 회장의 ‘과거와의 단절’ 주문이 부쩍 잦아졌다. 현재 화두는 헬스앤웰니스, 모빌리티, 뉴라이프, 지속가능성 등이다.
롯데그룹의 중추는 롯데케미칼이다. 신동빈 회장이 커리어를 시작했고, 아들 신유열 상무가 후계수업을 받는 곳이다. 2020년 12조원 수준으로 바닥을 찍은 연결기준 매출은 작년 10조원 이상 늘었다. 순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실은 이전만 못하다. 작년 적자전환 했고, 두 해 사이 순차입금은 3조원 가까이 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가 상승에 따른 스프레드 하락 영향을 받았고, 중국 리오프닝에 따른 전방 수요 회복도 기대만 못한 분위기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초 1조원대 유상증자로 한숨을 돌렸다. 여전히 현금창출력 대비 버거운 투자 부담이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인도네시아에 5조원 규모 화학단지(라인프로젝트)를 짓고 있다. 올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전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하면서 1조3000억원을 차입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의 영업이익으로는 이 차입금의 이자를 내기도 쉽지 않다. 회사의 시가총액은 인수가(2조7000억원) 가까이 떨어진 상태다.
한 재계 관계자는 “롯데그룹도 설비투자 부담을 다 떨어낼 때까지는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인수했다”며 “장기 투자니 당장의 주가 하락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경쟁이 심화하는 배터리 소재 산업에 진입하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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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쇼핑, 호텔 등 유통·소비재 관련 사업들의 고민도 깊다. 수익성 확보에 주력하는 전략이 일부 성과를 내지만 거시경제 변수에 따른 영향을 피하기는 어려운 모습이다.
롯데쇼핑은 백화점, 대형마트, 기업형수퍼마켓, 가전판매, 홈쇼핑, 온라인쇼핑 등 다양한 사업을 아우르고 있다. 팬데믹 후 보복소비 확산으로 백화점, 대형마트에서 양호한 성적을 거뒀지만 앞으로 두드러진 성장은 보이긴 어려운 상황이다. 롯데하이마트는 건설 경기 부진에 따른 가전 수요 감소, 점포 통폐합에 따른 이중고를 겪고 있다. 롯데지주 자회사 코리아세븐의 미니스톱 인수 역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이커머스의 더딘 성장세가 아쉽다. 이베이코리아(지마켓) 인수에 조단위 자금을 준비했던 때도 있지만, 이제는 수천억원대 M&A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미적대는 사이 유통사업 환경이 악화했고, 인력·점포 정리 등 긴축에 집중했다. 티몬과 컬리, 11번가 등 숱한 기업들과 협력설이 대두됐지만 성과는 중고나라 투자 정도다. 역설적이게도 자금력과 사업 실행력이 떨어진 덕에 이커머스 거품을 피한 셈이다.
호텔부문은 면세 부문의 부진이 수년 째 이어지고, 해외 여행객 추이에 따른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유통 사업과 마찬가지로 거시 환경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룹 지배구조에서 중요도가 높은 호텔롯데는 계열사 지원 부담도 크다.
롯데그룹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롯데건설이다. 작년 하반기 이후 부동산 시장 경색으로 자금줄이 막히면서 위기감이 컸다. 회사 재무라인이 백방으로 뛰어 계열사 자금 지원, 메리츠금융그룹과의 1조5000억원 규모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유동화증권 인수 투자협약 등이 이뤄졌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작년말 기준 롯데건설의 PF 보증 규모는 6조7000억원에 달하고, 이 중 4조3000억원이 미착공 개발 사업장에 관련돼 있다. 이는 회사의 자기자본(작년말 2조5848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모든 사업장이 부실화할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볼 이유는 없지만, 부동산발 신용위험 문제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지적 또한 적지 않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롯데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잠잠해지긴 했지만 비싸게 산 사업부지, 높아진 시공 단가와 PF 금리 등 부담이 여전히 크다”며 “사업장 분양이 원만하게 끝나기 전까지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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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은 여러 해에 걸쳐 지배구조 간소화 작업을 했지만 여전히 롯데지주, 일본 롯데홀딩스가 지배하는 호텔롯데 등을 중심으로 출자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롯데건설은 유동성 위기 때 롯데케미칼, 롯데정밀화학 등으로부터 출자 및 자금 대여를 받았다. 금융사들은 롯데케미칼의 라인프로젝트 시설 자금을 지원하며 롯데건설 재무 위기 영향을 꼼꼼히 살폈다. 롯데쇼핑은 IMM PE를 통해 한샘에 추가 출자를 집행했는데, EOD 발생 시 신용 위험이 그룹 전반으로 확산할 것을 우려했다는 후문이다.
롯데는 다른 대기업보다 투자 규모가 작고 시기가 늦었던 만큼 새로운 사업에서의 성과를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롯데바이오로직스를 통해 미국 BMS의 바이오 의약품 생산 공장을 인수하며 CDMO(위탁생산개발) 시장 진입 시기를 앞당길 계기를 마련했다. 다만 배터리 소재 분야에서 그랬든 바이오 사업에서도 치열한 설비투자 경쟁은 불가피하다. 롯데헬스케어는 올해 스타트업 알고케어의 아이디어 도용 문제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롯데그룹 전반의 재무 압박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큰데 성장 자금도 마련해야 한다. 이 때문에 롯데그룹 계열사들은 어느 때보다도 은행들과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고심하는 분위기로 전해진다. 각 계열사 차원의 사업효율화, 유동성 확보 가능성도 꾸준히 거론되는데 자본시장 경색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파키스탄 자회사 LCPL을 매각했다. 150억원에 사서 1900억원에 파는 성과를 냈다. 당장 얼마간의 현금이라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파키스탄의 경제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자금을 빼오는 데 애를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작년 김해CC 매각을 결정한 롯데리조트는 회원들의 반발을 마주해야 했다. 호텔롯데는 작년 여러 차례 유가증권을 매각했는데 그 규모는 각각 수백억원 수준에 그쳤다.
롯데쇼핑이 가진 우리홈쇼핑은 꾸준히 잠재 매물로 꼽혀 왔지만 실제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홈쇼핑 시장의 성장성이 크지 않고, 올해 2~7월 중에는 오전 2~8시 방송 송출 금지 처분도 받고 있다. 불편한 2대주주(태광산업 27.99%)의 존재도 M&A에 걸림돌로 꼽힌다. 소주 ‘새로’의 덕을 톡톡히 보는 롯데칠성음료는 오래 전부터 투자자들의 관심이 있는 계열사로 꼽힌다. 다만 경기를 떠나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내는 곳인 만큼 그룹에서는 사업부 매각이나 투자 유치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롯데그룹이 사업을 확장하거나 M&A를 할 자금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 우리홈쇼핑 등 몇몇 사업에 대한 매각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지만 성과를 내기 쉽지 않다”며 “과거 주류사업을 내놓고 어려움을 겪은 두산그룹의 선례가 있기 때문에 주류 관련 사업은 계속 안고 가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