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 보장'한다는데 전제조건은 '충분한 손실흡수능력'
말로만 '자율' 실제론 고무줄 잣대…시장선 기준 "모르겠다"
부실 우려 커지는데…돈 쓰지 말고 손실 부담 준비하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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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 투자자 유치전에 조력자로 나섰다. 막상 금융권에선 선뜻 반기는 분위기만은 아니다. 올 초 앞다퉈 주주환원 강화 방안을 내놨을 때까지만 해도 '자본을 더 쌓으라'며 찬물을 끼얹던 이 원장의 '주주환원 자율성' 발언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자율성 보장의 전제 조건으로 내건 손실흡수 능력은 시장에서 사실상 고무줄 잣대로 통한다. 고개를 드는 시장의 잠재 부실 상당 부분을 은행지주가 떠안아야 할 거란 우려도 적지 않다. 회사도 장담하기 어렵고 투자자도 기대하기 어려운 주주환원책을 감독당국 수장이 선전하며, 당사자들만 속이 끓게 됐단 평이다.
이복현 원장은 지난 9일 싱가포르 팬 퍼시픽 호텔에서 열린 '금융권 공동 싱가포르 투자자 설명회(IR)'에서 "은행 등 국내 금융회사의 고질적인 저평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충분한 손실흡수 능력 유지를 전제로 주주환원 정책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금융당국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발언했다.
IR에 참석한 해외 투자가가 국내 은행지주의 저평가 문제를 묻자 이 원장이 감독당국의 입장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앞서 이 원장은 한국 금융시장의 국제화 및 해외투자 유치·해외진출 확대 지원 목적으로 8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태국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3개국 방문길에 올랐다. 이번 출장엔 윤종규 KB금융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 등 은행지주 수장도 동행했다. 금감원장이 세일즈 지원을 위해 직접 출국길에 오른 것 자체가 낯설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금융당국 출신 한 관계자는 "원칙적으로는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 IR 지원은 금융위원회 역할로 금감원장이 세일즈맨으로 전면에 나서는 게 이례적이긴 하다"라며 "금융위 측에서 감독기관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만큼 문제 삼기는 어렵고 내부적으로 조율이 된 사안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선 그간 은행지주와 감독당국 간 긴장 관계를 고려하면 이들의 동행을 어색한 장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은행지주 주주환원책에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대목이 가장 주목을 받는다. 이 원장의 다짐이 얼마 전 은행지주의 1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드러난 주주환원책에 대한 입장과 온도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투자자 사이에선 이번 실적 시즌을 기점으로 KB·신한·하나·우리금융 등 4대 은행지주의 향후 주주환원 정책이 모호해졌다는 시각이 늘었다.
증권사 은행지주 담당 한 연구원은 "연초만 해도 4대 은행지주 모두 종전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주주환원책을 내놓으며 시장의 기대감이 높아졌는데 불과 두 달여 만에 말끝을 흐리는 모습으로 돌아섰다"라며 "연체율 등 건전성 지표가 악화한 탓도 있지만 금융당국의 추가 자본 확충 요구가 주주환원책의 가시성을 가로막는 형국이라 전망하기도, 기대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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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은행지주들도 감독당국이 말하는 '충분한 손실흡수 능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 은행지주의 향후 주주환원 전망에 대한 눈높이는 보통주자본(CET1) 비율 12~13.5% 사이에서 형성돼 있다. 4대 은행지주가 현행 규제비율인 8%를 시작으로 감독당국이 요구하는 경기대응 완충자본 2.5%는 물론 추가 손실흡수 대응력까지 감안해 직접 제시한 기준선이다. 당초 은행지주 모두 이 기준에 따라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 등 방식으로 총주주수익률을 계속해서 끌어올리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최근 각사 IR에선 이 같은 기준이 유명무실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4대 은행지주 모두 향후 자본관리·주주환원 정책은 감독당국의 경기대응·손실흡수 목적 자본확충 요구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내놨다.
이미 각사 자본비율에 반영된 항목들이다 보니 사실상 '우리도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로 들렸단 이야기까지 나온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면서 그 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건 사실상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속내로 풀이된다"라며 "연초 이복현 원장이 손실흡수 능력 제고 유도 방침을 내놓을 때에도 은행권이 사상 최대 이자이익을 냈음에도 상생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곁들였었다. 함부로 돈을 쓰지 말라는 경고로 비칠 수 있는 셈"이라고 전했다.
결국 이 원장의 이례적 세일즈 행보에도 은행지주의 주주환원책은 답답한 국면이 이어질 거란 목소리가 높다. 자본비율이 개선세를 보여도 뚜렷한 입장을 밝히기 어려우니 시장도 기대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감독당국이 이처럼 모순적 입장을 취하는 배경에 금융권 전반에서 부상하는 잠재 부실 우려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 카드·캐피탈·저축은행 등 2금융권을 중심으로 팬데믹 기간 가려졌거나 미뤄진 부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반기 중 다섯 차례 재연장된 코로나 금융 지원 조치도 종료 수순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부실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은행지주에 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는 얘기다.
크레딧 업계 한 관계자는 "금감원을 비롯해 정부 차원에서 은행권이 돈을 너무 많이 벌었다는 시선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라며 "감독당국은 은행지주 더러 구체적 기준 없이 자꾸 자본을 쌓으라고 하는 것 외에 성과보수 체계까지 겨냥하고 있다. 대통령의 공공재 발언도 그렇고, 주주환원이나 성과급 형태로 돈을 쓰지 말고 정부를 대신해 시장 안정에 필요한 비용을 쌓아두란 뜻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