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서 '인수설' 보다 구체화하는 형국
글로벌 IB들 사이에서 설왕설래 잇따라
반도체 패권 경쟁 속 존재감 피력 중요해
지정학적 요인에 M&A 허들 점점 높아져
부진한 가전사업도 주목…M&A 실익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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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대형 M&A는 하만 인수 이후 계속된 화두다. 어느 때는 초격차를 유지하려, 또 어떤 때는 국민 기업으로서 역할을 부각하기 위해 쓰였다. 지난 수년간은 그룹 수뇌부까지 공개적으로 대형 M&A를 장담하며 눈길을 모았는데 아직까지는 드러난 성과가 없다. 검토를 위한 검토만 한다는 평이 따랐다.
그런데 올해 들어선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는 분위기다. 지금까진 훈수와 기대가 담긴 잠재 인수후보들이 거론된 게 대부분이었다면, 최근엔 삼성전자가 실제 살피고 있다는 기업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새로운 영역으로 외연을 넓히는 것보다 기존 사업을 강화할 수 있는 곳이란 특징도 있다. 자문사 선정 움직임까지 언급되며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투자은행(IB) 사이에선 이미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다. 다만 현실성은 또 다른 차원의 얘기다.
IB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미국계 IB를 자문사로 선정, 네덜란드 ASML 인수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또 다른 IB는 삼성전자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글로벌 가전 기업 인수를 함께 검토 중이라는 언급도 오가고 있다. 잠재 후보로는 일렉트로룩스나 월풀 등이 꼽힌다. 미국 앰코테크놀로지는 올해 초부터 꾸준히 인수 후보로 거론됐다. 최근 들어 진행 여부를 파악하려는 IB의 움직임도 보인다. 삼성전자는 이와 관련해서 "확인이 가능하지 않다"며 "지속적으로 밝혔듯 유의미한 M&A는 하겠다는 게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현 시점에서 대형 M&A 소식을 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응원한다면서도 ‘설마’ 하는 반응이 많다.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반도체인데 메모리 분야에서는 이미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M&A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메모리 역시 설계나 위탁생산(파운드리) 모두 마땅한 매물을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초격차’에 이르지 못했다. 비메모리와 전장 사업을 한번에 살릴 인수 대상으로 NXP, 인피니언 등 차량용 반도체 기업들이 거론됐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기 전이고, 몸값이 적정했으며, 무엇보다 각국 경쟁당국의 눈초리가 상대적으로 부드럽던 시기다 보니 실기의 아쉬움이 컸다. 작년엔 ARM이 인수 여부에 이목이 모였지만 이미 업계 ‘공용자산’인 이 기업을 사는 것은 애초부터 쉽지 않았다.
핵심 공정장비 업체나 기술·특허를 가진 곳을 인수해 역량을 보강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이란 평가다. ASML은 반도체 고도화에 필수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독점생산한다. 삼성전자는 2012년 이 회사 지분 3%를 인수했고, 지금도 1.5%를 보유하고 있다. ASML을 인수하면 장비 수급에서 TSMC를 앞설 수 있고, 미세공정 전환 과정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쥐게 된다.
앰코테크놀로지는 올해 초부터 다시 이름이 오르내린다. 세계 2위 반도체 패키징 업체로, 삼성전자의 주요 파트너사다. TSMC가 글로벌 1위 파운드리로 성장한 배경엔 글로벌 1위 패키징 업체 ASE테크놀로지와의 협력이 꼽힌다. 삼성전자 역시 TSMC에 대항하기 위해선 앰코와 같은 기업을 인수해 후공정 라인을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들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수월친 않다. ASML을 인수하려면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 100%를 사야 하는데 몸값이 삼성전자 시총에 육박한다. 소수지분 투자 정도를 떠올릴 만한데 '돈 받을' 일정이 밀려 있는 ASML은 자금이 급하지 않다. 이러니 ASML보다 EUV노광장비의 핵심 기술을 가진 독일 자이스(ZEISS)를 인수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시선도 있다. 자이스의 시가총액은 10조원대다.
몸값보다 각국 경쟁당국의 벽이 높다. 유럽도 반도체 패권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다. 반도체 밸류체인의 핵심 길목을 틀어 쥔 ASML을 다른 나라 회사에 넘어가게 둘 리가 만무하다. 반도체 관련 사업을 하는 거의 모든 국가의 반대가 불 보듯하다. 앰코는 몸값이 10조원 미만이고 글로벌 2위 기업으로 ASML보다는 수월한 인수 대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경쟁하는 반도체 회사들도 고객으로 두고 있어 이들 기업과 해당 국가의 반발을 피하기 어렵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제 정세는 급변했다. 미국은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 파운드리 산업이 편중되면 안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반도체 기업들에 미국으로 들어오거나 중국과의 접점을 줄이라 요구한다. 잊혀졌던 반도체 왕국 일본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며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과 인텔 등 글로벌 기업들이 일본으로 몰려들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은 외줄타기 상황이다. 미국의 반도체 견제에 중국은 미국 마이크론 제재안으로 맞불을 놨다. 중국에 생산 설비를 둔 우리 기업들에서 필요분을 충당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렸단 분석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삼성과 SK가 한 쪽 편만 들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미국에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이 중국에서 반도체를 더 생산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하는데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M&A를 둔 설왕설래가 잦아지는 것은 그만큼 급하다는 반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검토 소식이 알려지면 M&A를 접거나, 공시 위반을 피하기 위해 새벽 이사회를 소집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삼성전자 주변에서 구체적인 얘기가 오가는 것도 시선이 모인다. M&A 특명을 받은 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자연스레 말이 많아지는 것 아니냔 분석도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패권 경쟁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고 있지만, 현재 글로벌 정세를 감안하면 쉽지 않다. 산업 지형 재편을 주도하는 미국에 ‘우리편’이라는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면 돈이 있어도 M&A를 통한 ‘초격차’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의 존재감을 유지하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손실을 결단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 가전 사업도 반도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글로벌 가전 시장 수위권 업체지만, 최근엔 성장 동력을 찾기 어려운 분위기다. 작년 이후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1분기 영업이익은 LG전자에 밀렸다. 2016년 인수한 미국 가전업체 데이코(Dacor)의 성과도 미진하다. 삼성전자는 해외 법인에 직원을 파견해 가전 사업 전략을 다시 살피기로 했다.
삼성전자 전사적인 차원은 아니라도, DX부문으로선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대형 M&A를 고민할 만한 상황이다. 한종희 부회장(DX부문장)도 여러 차례 M&A 가능성을 내비친 바 있다. 다만 마찬가지로 M&A 허들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도체만큼 민감한 첨단 기술은 아니지만 글로벌 수위권 업체간 M&A는 기업결합 심사가 깐깐하다.
과거 일렉트로룩스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가전사업부 인수를 추진했지만 미국 경쟁당국을 넘지 못했다. 회사는 계약금을 날렸고, CEO도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삼성전자도 당시 GE 가전사업부 인수를 고민했으나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소비자를 가전 생태계에 묶어두지 못한 상황에서 M&A로 덩치만 키운들 큰 효용이 없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