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위축…돈있는 은행 최선책이지만
금융사 계열한도 목전까지 찬 대기업 많아
지배력 낮춘 JV 활용, '한도 우회' 고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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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은 경기 불안이 장기화하며 보수적인 경영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신사업이나 투자를 줄이는 한편 혹시 모를 유동화 위기에도 대비하려 분주하다. 많은 기업들의 현금 창출력은 줄었고, 자산 매각은 시장에 위험 신호를 주게 될까 선택하기 어렵다. 우량 대기업 채권 수요는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이지만 들쑥날쑥한 금리가 부담스럽다.
기업들은 결국 은행들을 찾는 빈도를 늘리고 있다. 예전이면 의례적으로 여신 한도(크레딧라인)를 열어두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가능한 최대 수준으로 자금 활용선을 넓혀두려 한다. 돈 많은 삼성전자가 일시적으로 부족한 자금을 계열사에서 끌어다 쓸 정도로 변수가 많은 시기다 보니 은행 안전판을 꾸려둬서 나쁠 게 없다.
다만 기업이 은행에서 마련할 수 있는 자금도 한도가 있다. 은행법에선 동일차주(기업집단 소속)에 대해서는 은행 자기자본의 25%를 초과해 신용 공여를 할수 없다고 규정한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도 각기 법에 따라 자기자본의 25%, 50%의 상한 제한이 있다.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되다 보니 돈을 빌리는 기업도, 빌려주는 은행도 한도 관리에 민감한 모습이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사업부를 인수하며 금융권 차입을 일으켰는데, 그 전에 키옥시아 투자 관련 대출금을 상환하기도 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대기업들도 미리 적극적으로 자금 라인을 만들어두고 있다”며 “웬만한 대기업 계열사들은 한도가 거의 차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은행권 외에도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차입금을 늘리기 어렵다면 우선주 발행 등 자본을 활용한 방법을 강구하라는 방침을 내린 그룹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무한정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관투자가들은 여전히 보수적으로 시장을 보고 있고, 또 기존에 활발히 움직인 기업들에 대해서는 내부기준에 따라 위험노출액(익스포저)도 관리하고 있다.
돈이 있는 곳은 결국 은행지주 계열뿐이니 현재 상황에서 활로를 찾을 방도를 구상할 필요도 있다. 조인트벤처(JV)를 활용하는 방안도 그 중 하나로 거론된다. 외국 기업과 합작사를 설립하되 그에 대한 지배력을 낮출 수 있는 장치를 활용하는 식이다.
해외 투자가 급한 기업이라면 이를 통해 계열 한도를 벗어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최근 대기업과 금융사가 협력을 약속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는데, 이런 구상이 깔려 있을 것이란 시선도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최근 투자가 많았던 기업들은 금융권 여신한도가 꽉꽉 차서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야 하는 상황이다”며 “연결기업이나 종속기업이 되지 않는 JV에 대한 여신은 계열과 무관한 것으로 보자는 논의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보통 기업이 대등한 위치에서 해외 기업과 JV를 설립하면 지분을 50대 50으로 나누고 경영권도 함께 행사하는데 계열로 편입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투자자를 끼워 지분율을 45대 45대 10으로 나누면 계열 편입 가능성이 더 줄어든다. 지분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질 지배력’이다. JV 지분 70%를 가진 기업이라도, 나머지 30% 투자사가 이사회 의석을 모두 차지하고 있거나 중요 의사 결정에 대한 거부권(veto)를 가진 경우라면 지배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내 기업과 외국기업이 설립한 JV의 실질 경영권이 외국 회사에 있고 지분도 그쪽이 많다면 국내 기업이 지배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고, 이런 JV에 대출을 한다면 신용공여 한도를 피할 수도 있다”며 “실질 지배력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데 어느 정도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갈 여지는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