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더 살얼음판
SK·롯데 등 위기론 컸지만 한숨 돌린 상황
자구안으로 버티는 사이 시장 상황 안정화
네트워크·자산 활용해 위기 대응력 입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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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기업들은 대대적인 유동성 살포에 힘입어 코로나 팬데믹 위기를 무난히 넘겼다. 그러나 엔데믹 국면에서 급격한 유동성 긴축 정책이 이어지며 자금줄이 말랐다. 국내 금융시장에선 레고랜드 사태, 뱅크런 우려 등 요소까지 겹쳐져 위기감이 더 컸다. 멀쩡한 대기업들이 단기간의 자금 소요나 금리 부담에 대응하지 못해 흑자도산할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국내외 경제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점차 낙관론이 확산하며 대기업들의 자금 사정도 나아지는 모습이다. 자본시장에선 대기업들의 내재 가치에 집중하며 투자 열기를 보이고 있다. 그간 쌓아온 우량 자산이 많은 만큼 웬만한 시장 위기에는 대응할 수 있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가장 주목을 받은 곳은 SK그룹이다. 활발하게 투자 행보를 이어간 터라 금리 인상에 대응하기 벅찰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 상당수 금융사와 기관투자가의 SK그룹 계열 여신한도가 꽉 차 있어 손을 벌릴 곳이 마땅치 않았다.
특히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풍파에 솔리다임 사업 고민까지 이어지며 그룹 위기론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회사는 올해 국내외 채권 시장에서 조단위 자금을 조달하며 점점 불안감을 지워가는 모습이다. 4월엔 17억달러 규모 교환사채(EB)를 발행해 분위기를 완전히 돌려놨다. 한 외국계 증권사는 이를 계기로 의견을 매도에서 매수로 바꿨다. 좋지 않은 장에서 이 정도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역량이 있다면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SK온은 작년 투자유치 시기를 놓치며 기업 가치와 조달 규모 면에서 손해를 봤다. 설비투자 지연 여파가 앞으로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지적이 있었다. 올해 잇따른 투자 유치 소식을 전하며 우려를 대로 바꾸고 있다. 힐하우스캐피탈은 MBK파트너스와 함께 투자를 검토했는데 의사 결정이 지연되며 투자 기회를 놓칠 뻔했다. 뒤늦게 SK온에 접촉해 투자에 참여하게 됐지만 다른 곳보다 조건이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자와 기싸움을 할 정도로 SK온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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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이후 가장 애를 먹은 곳은 건설사들이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막히고 분양 전망이 어두워지며 흑자부도 우려가 커졌다. 롯데건설의 경우 재무라인이 계열사와 금융 시장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자금을 마련했다. 올해 초 메리츠증권과 조단위 펀드 결성에 성공하며 위기설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다른 대형 건설사들도 자금 융통에 애를 먹었는데, 기초 체력이 탄탄하고 우량 자산들이 많은 곳들은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롯데케미칼도 자금 사정이 녹록지 않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서 각종 사업 확장 자금에 롯데건설 지원까지 신경써야 했다. 수조원대 인도네시아 라인프로젝트 수행 부담도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올해 24억달러 규모 외부 자금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대주단은 라인프로젝트 자체의 사업성이나 롯데케미칼의 기초 체력엔 크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채권 시장은 점차 온기를 되찾고 있다. 시장 금리는 작년 4분기 정점을 찍은 후 점차 내려오는 분위기다. 앞으로 기준금리가 더 오를 가능성이 있지만 점차 그 끝이 보인다는 전망이 많다. 채권 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에 투자 수요도 회복되는 모습이다. 에쓰오일과 LG유플러스의 경우 각각 2400억원, 15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에 1조원 이상씩의 수요가 몰렸다. 호텔롯데, 한화솔루션, HD현대오일뱅크 등 우량 대기업 채권에도 발행 목표치의 몇 배에 달하는 투자 수요가 이어졌다.
대한항공은 팬데믹 이후 항공권 판매수익을 기초자산으로 한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기 어려워졌다. 신용도 방어에도 애를 먹었다. 그러나 올해 항공업황이 회복되며 발행시장에서 분주한 모습을 보였고, 사무라이본드(엔화표시 채권) 발행 카드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는 발행 규모뿐만 아니라 금리 등 조건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평가다.
대기업들은 공고한 지위를 바탕으로 쌓아둔 자산이 많다. 언제든 급격한 위기 상황이 다시 찾아올 수 있지만 가지고 있는 자산만 잘 활용해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자금 조달이나 사업효율화 목적의 자산 매각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투자은행(IB)들은 대기업의 자산 중 거래로 이어질 만한 것이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분위기다. 작년 이후 투자금을 제대로 소진하지 못한 국내 사모펀드(PEF),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해외 투자사들도 기업들엔 잠재적 우군이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작년말 이후 위기론이 부각된 대기업이 많지만 실제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곳은 없었다”며 “앞으로도 대기업들은 그간 다져둔 자금조달 역량과 가용 자산들을 활용해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