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박근혜-이재용 뇌물수수, 정부 부당 관여 인정
국가배상법상 부당행위 공직자에 손해배상 청구가능…실익은 별개
결국 최종 수익자 사인(私人) 이재용 회장에 청구 가능한가 핵심
1심서 패소한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번 중재판정이 2심에 영향 미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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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에 1300억원가량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국제중재 판정이 나왔다. 정부와 국민연금이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개입하며 삼성물산 주주로서 손해를 봤다는 엘리엇의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진 것이다.
대규모 세금이 지출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삼성그룹도 책임을 나눠지게 될 것이냐에 관심이 모인다. 우리 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를 인정한 터라, 이론적으로 그 실익을 누린 이 회장 측에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구상권 행사 여부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지난 20일 법무부는 엘리엇이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의 판정부로부터 판정 결과를 수령했다고 밝혔다. 판정부는 우리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 7억7000만달러(약 9917억원)의 7% 수준이다. 배상원금에 이자(연복리 5%)까지 포함한 배상금액은 13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정부와 엘리엇의 법적 다툼의 씨앗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을 결정하자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가지고 있던 엘리엇은 합병비율(1대 0.35, 제일모직 대 삼성물산)을 문제삼아 합병 반대에 나섰다. 엘리엇의 주주총회금지 가처분 신청은 법원에서 기각됐고, 같은 해 7월 두 회사의 합병이 주주총회에서 통과됐다.
엘리엇은 2018년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개입해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봤다며 국제중재를 신청했다. 국정농단 특검이 이재용 회장이 합병을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재판에 넘긴 게 계기다. 엘리엇은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국민연금이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찬성했을 것이라거나 엘리엇이 실제론 이익을 봤다는 반박 논리를 편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엇은 쓰리크라운스(Three Crowns)와 KL파트너스, 정부는 프레시필즈(Freshfields)와 광장의 중재 자문을 받았다.
중재는 5년에 걸쳐 진행됐는데 중간에 변수가 생겼다. 2021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형이 확정됐고, 이재용 회장도 뇌물공여 등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았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도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박한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됐다.
우리 사법부가 부정한 청탁에 대한 뇌물 수수, 정부의 적절치 않은 개입에 대해 확인한 셈이다 보니 정부의 ISDS 수행이 쉽지 않았다. 핵심 목표가 완전한 승리보다는 배상액을 최대한 낮추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 쟁점은 배상액 산정의 기준이 무엇이냐였는데 엘리엇은 삼성물산 가치가 저평가 돼 있다며 ‘내재가치’를 따져야 한다고 했고, 정부는 시장가치를 봐야 한다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인데, 정부는 이번 중재 결과를 두고 93% 승소라고 평했다.
정부가 방어에 최선을 다했지만 천억원이 넘는 혈세가 해외로 나갈 상황이 됐다. 다른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탈도 엘리엇과 같은 사안으로 2억달러 규모 ISDS를 제기한 상황이다. 작년 청구금액 6조원의 ‘론스타 사건’이 10년 공방 끝에 정부의 2억1650만달러 배상 판결로 끝났고, 아직 진행 중인 ISDS 사건도 많다.
정부 입장에선 배상액을 최소화하는 한편, 이미 발생한 배상액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부가 배상금을 지급한 후 관련자들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할 것이냐에 시선이 모이는데 법조계에서는 "가능하다"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가배상법에 따르면 국가는 공무원이나 공무를 위탁받은 사인(私人)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공무원에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국가는 그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미 형사 처벌까지 확정된 터라 대통령이나 장관, 국민연금 이사장 등의 고의ㆍ중과실은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로 정부가 구상권을 행사하기엔 고민해야 할 요소가 많다. 구상권을 행사하려면 결국 시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의 책임을 지고 형을 살다가 사면됐다. 현 정권과 같은 정당 출신 원로에 대해 책임을 묻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장관이나 국민연금 이사장도 잘못이 있긴 하지만, 공직자가 정부 수뇌부의 뜻을 거스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국가배상법에서 고의ㆍ중과실을 요건으로 하는 것도 결국은 공직자가 업무 시 위축되지 않게 하려는 입법정책적 고려다. 정부가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 공무원들 모두에게 구상권을 행사한들 자금 회수 실익이 크지 않다는 점도 신경써야 한다.
한 대형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는 “이번 중재 판정은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내려졌는데 과연 정부가 그에 대해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는지 별개사안”이라며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게 청구할 수 있더라도 그 분쟁절차에서는 결국 정부의 책임론이 거론될 것인데 구상권을 행사할 실익이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삼성그룹 측에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가 관심사다. 이번 사안의 단초는 결국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문제다. 이재용 회장이 뇌물을 제공했고, 정부와 국민연금이 움직였고, 원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최대 수혜자는 이재용 회장이고, 그렇다면 정부가 돈을 청구할 곳도 이 회장이어야 하는 것 아니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은 개인이지만 다른 전직 공직자와 달리 변제 여력도 있다.
정부가 사인(私人)인 이재용 회장에 국가배상법에 따라 구상권을 행사하긴 어렵다. 다만 민법상 불법행위로 봐서 구상권을 행사할 수는 있다는 의견이 있다. 정부와 삼성그룹 측이 불법행위로 엘리엇에 손해를 끼쳤다고 본다면, 배상액 부담도 그 안에서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삼성물산이나 제일모직 등 법인의 행위로 엘리엇에 손해를 가한 경우라고 판단된다면, 그 사항의 의결에 관여한 법인의 이사나 대표자가 손해를 연대 배상해야 한다. 정부 입장에선 자금 회수보다는 재계와 관계가 냉각되는 것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앞으로 대응 방향에 대해 내부에서 협의하고 있고, 엘리엇 측과도 비밀유지 관련 협의 중이라 현재로선 밝힐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중재가 다른 사안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주목된다. 이재용 회장의 경우 ‘국정농단’ 재판은 끝났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핵심인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 재판이 현재진행형이다. 엘리엇과의 중재 결과는 이와 별개긴 하지만 적어도 이 회장에게 유리한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은 작년 엘리엇과 유사한 취지로 소를 제기했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1심 재판부는 문형표 전 장관이 국민연금의 결정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한 점은 인정했지만, 직권남용과 주주들의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중재 판정이 2심에서 참고 자료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한 소송 전문 변호사는 “국내 법원이 국제 중재판정을 얼마나 고려할지 의문이지만 인과관계는 국내든 해외든 모두 고려가 되는 요소”라며 “국내외 판단기준의 차이는 있어도 사실관계는 동일하기 때문에 2심 재판부에서는 중재에서 인정된 내용을 고려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