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무부는 엘리엇과 한국 정부 간 국제투자분쟁(ISD) 결과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가 93% 승소했다고 밝혔다.
고작(?) 7%의 패소로 인한 계산서는 5360만달러, 우리돈 690억원이다. 여기에 지연 이자 연 5%를 더하면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해야하는 금액은 약 1300억원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이겼지만 우리 정부는 엘리엇에 약 2890만달러(약 372억원)을 법률비용으로 지급해야하는데 이는 엘리엇이 우리 정부에 지급할 금액 약 346만달러(약 45억원)의 8배가 넘는다. 모든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한다. 삼성그룹 또는 오너에 대한 구상권 청구 가능성 등도 배제할 수 없다.
애초 엘리엇이 제기한 약 1조원대 소송 규모가 현실적이었느냐는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이번 결과에 '승소'라는 표현이 적절한 지가 나타난다.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가 4.6%만 청구액을 인정한 론스타와의 분쟁에선 정부가 대승을 거둔 꼴이 된다. 정부는 아직까지 약 2억1650만달러(약 2900억원)를 배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몇 퍼센트의 비율로 소송전에서 이겼느냐는 본질을 흐리는 요인이다. 엘리엇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결국 중재판정부가 일부든 전부든 정부 개입을 '인정'했다는 데 있다.
정부 개입에 쓰인 칼은 국민연금이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에 찬성 압력을 행사해 손해를 봤다는 게 엘리엇의 주장이었다.
국민연금의 찬성표가 자의적인 판단 또는 정부의 압력에 떠밀린 결정이란 문제를 차치하고도, 그 당시와 다름 없이 현재까지 국민연금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기관이란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삼성물산의 합병이 진행됐던 박근혜 정부, 국민연금에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며 기업 개입의 길을 터준 문재인 정부, 그리고 주인 없는 기업에 대해 국민연금이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윤석열 정부까지 국민연금의 독립성은 끊임없이 의심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취임 후 하루 만에 공식 석상에서 던진 메시지는 수익률 전략과 장기적 비전도 아닌, 기업을 향한 노골적인 저격이었다. KT 대표이사 선임 과정에서 '투명성'을 언급했는데 그 여파로 기간통신사업자인 KT의 수장 자리는 반 년 넘게 비어있다.
대표이사 후보의 자질과 능력, 도덕성에 의심이 간다면 주주로서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업무의 인수인계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기금운용본부장을 통해 정권의 의중과 의도가 오롯이 전달됐다는 것이 KT 사태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시각임에는 틀림없다.
내홍을 겪고 있는 KT에 만약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펀드가 가세한다면?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고, 현실적으로 어렵지도 않다. 삼성물산, 현대차그룹을 공격할 당시의 절반에 못미치는 자금만으로도 충분하다. 국재 중재를 통해 배상금을 일부 받아낼 요량으로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경영 공백을 초래했고, 비상경영체제 하에서 주주로서 유·무형의 손실을 입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면, 이를 과연 비약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비단 KT만의 문제는 아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어느 정부에서든 정부의 금융지주에 대한 경영 개입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이 바뀌고, 회장이 바뀔 때마다 그룹의 비전이 180도 변하는 포스코그룹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지금은 "우리가 93%를 이겼다"며 자찬할 때가 아니다.정치적으로 완벽한 독립이 이뤄진 조직에서 업계 최고 전문가들이 기록적인 수익률을 나타낸다면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을 대부분 불식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 모든 의사결정의 기저에 '수익률'이 깔려 있다는 전제가 명확하면 엘리엇과 같은 외부의 공세는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게 명백한 현실이다.
어찌보면 주인 없는 기업을 향한 정부의 영향력이 커진, 그리고 국민연금의 칼 끝이 직접 기업을 향하고 있는 지금이 행동주의펀드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올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입력 2023.06.23 07:00
Invest Column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3년 06월 21일 15:51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