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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의 청구서가 이제서야 도착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에 1300억원가량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판정을 내놨다.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이 당시 합병으로 손해를 봤다는 주장 일부가 받아들여진 결과다.
국내에선 엘리엇의 청구액 가운데 7%만 인정했다며 정부의 승리라는 평가도 나왔지만 외신을 비롯한 해외의 평가는 다르다. 일례로 월스트리트 저널은 기사 제목을 아예 '엘리엇이 한국 정부와의 다툼에서 승소했다("Hedge-Fund Giant Elliott Wins Against South Korea in Longrunning Samsung Spat")'라고 뽑았다.
어쨌든 그 긴(?) 시간을 거치면서 이재용 부회장은 여러 고초를 겪은 후 '회장' 타이틀을 달게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어지는 논란을 지켜보느라면 "과연 편법을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거래였나"라는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론 누구도 웃을 수 없는 상황만 펼쳐졌다.
그리고 그 여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합병' 삼성물산이 애초에 했던 약속은 지켰을까. 그만큼 삼성그룹은 한 단계 도약을 했을까. 아니면 되레 퇴보했을까. 이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이재용 회장은 피의자인가, 피해자인가.
애초에 이 딜(Deal)은 말이 많았다. 합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이 그랬다.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삼성물산이 더 높았다. 2014년말 삼성물산 평균 주가와 제일모직 공정가액으로 두 회사의 가치를 따지면 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1.3주를 줘야 했다. 삼성물산 3주당 제일모직 1주를 주는 합병가액과는 간극이 커도 너무 컸다. 엘리엇은 이 지점을 파고 들었다. 제일모직 주가는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졌고, 삼성물산 주가는 그 반대이니 합병 비율이 불공정하다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합병의 최대 수혜자는 명확했다. 본인 지분 희석을 최소화하며 연결고리가 약했던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당시 '부회장'이었다. 합병 발표 전 삼성물산 지분 4.8%를 보유하고 있었던 엘리엇은 당시 이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과정이 자신들의 보유 지분 가치에 피해를 끼친다고 판단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1대 주주인 국민연금을 비롯해 삼성SDI, 삼성화재, 삼성생명 등 주요 주주들에게 합병 반대 의사를 표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도 합병 반대 의견을 냈다. ISS는 자문 보고서를 통해 "합병 절차가 법을 준수하고 있지만 삼성물산의 주식 가치가 저평가돼 있어 주주에게 현저히 불리하다"며 "합병 이후 시너지 효과에 대한 전망도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밝혔다.
엘리엇은 한국 재판부에 판단을 맡겼다. 삼성물산 등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총회 결의 금지 및 당시 백기사였던 KCC의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 항고심에서 법원은 엘리엇의 신청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병비율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적법하게 산정됐고, 합병 공시 후 삼성물산의 주가가 상승한 점을 봤을 때 합병목적이 부당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이후 상황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각 회사의 임시 주주총회에서 승인됐고, 결국 그해 9월 합병에 성공했다. '당연히' 국민연금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그 과정에 불거진 4조5000억원대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이슈는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됐다. 이 분식회계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제일모직의 가치를 높여주기 위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의 본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삼성바이오 회계 변경→유가증권시장 상장'으로 이어지는 이재용 부회장 경영 승계 과정의 부정 의혹의 핵심이 됐다.
곧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됐고 그 결과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2021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형이 확정됐고, 이재용 회장도 뇌물공여 등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았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박한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됐다. 그렇게 잊혀질 것 같던 사건이 1300억원의 청구서로 환기된 셈이다.
공식적으론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이뤄낸 '성과'지만, 결국 관심은 이재용 회장으로 쏠린다. 삼성이 잘못한 걸 왜 정부가 배상을 해야 하느냐, 즉 이재용 회장과 삼성에 대한 구상권 청구 여부다. 이 회장 입장에선 경영권 승계의 후폭풍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있다.
한 편에선 이재용 회장이 '안쓰럽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이 회장이 당시 딜을 처음부터 구상한 실질적인 주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결국 그룹 실무진에서 올린 아이디어를 채택했고 그 결과로 구속 수감까지 하며 법적인 책임을 졌는데 구상권까지 더할 수 있냐는 것이다. 또 "삼성전자가 현재 국제 정세에서 갖는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고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결국 찬성표를 던진 건 당시 정부인데 지금 부담을 더하는 것이 '대승적'으로 적절하냐"라는 거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삼성그룹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같은 건이 처음이 아닌,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이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 증여 사건 같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는데도 또 한 번 이런 일을 자행했고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이 회장이었다. 그로 인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물론 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다는 점에서 반드시 이 책임을 삼성과 이재용 회장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태로 득(?)을 본 곳도 있다.
삼성물산 합병사태로 다른 재벌 그룹들은 승계과정에서 더 이상 '편법'을 쓸 생각을 아예 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든, 한화그룹이든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권 승계를 진행 중인 그룹들은 삼성을 반면교사 삼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정도(正道)'를 걸을 수밖에 없게 됐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유야무야 넘어갔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발전하고 또 시장 참여자들이 다양해지면서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워지기 마련"이라며 "차후에 보면 비용적 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나지 않을텐데 당시 삼성은 사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에버랜드나 SDS 전례도 있었듯 이번에도 경영권 승계 비용을 조금 아껴보겠다는 것이 그룹 전체를 멈추게 할지는 당시에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것"이라며 "이건희 회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런 사단을 겪고 나서 삼성물산, 그리고 삼성그룹은 어떻게 됐을까.
합병 추진 당시 삼성물산의 목표는 '2020년 매출 60조원, 세전 이익 4조원'이었다. 건설과 상사, 패션, 레저·식음료, 바이오 등 5개 부문에 걸쳐 2014년 33조6000억원이었던 매출액 규모를 6년 만에 2배 수준으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2020년말 연결기준 삼성물산의 매출액은 30조원, 세전순이익은 1조4651억원이었다. 2022엔 매출 43조원, 세전순이익 3조3345억원을 기록했다. 합병 당시 내세웠던 당찬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삼성물산 자체의 존재감은 크게 줄었다. 바이오를 제외하면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게 없는 회사가 돼 그 때 내걸었던 기치가 낯 부끄러울 정도다.
존재감 측면에서 보면 그룹으로 확장을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때 10만전자를 부르짓던 삼성전자는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냈다. 미중 갈등과 반도체 전쟁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다시 힘을 받으며 7만전자가 되긴 했지만 이전보다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삼성전자 안에서는 물론 그룹 전체의 반도체 의존도는 더 극심해졌다. 그나마도 D램을 제외하곤 영역 확장이 쉽지 않고 경쟁 강도는 나날이 거세지고 잇다. 비(非)전자 계열사들에서도 예전 같은 '1등주의'를 느끼기 어렵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삼성물산 합병 이후만 놓고 보면 삼성이 한국 재계를 이끄는 톱티어 자리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처럼 상대적으로 그런 이슈에서 자유로운 총수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이 회장은 그냥 '친근한 재벌' 이미지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의 불안정한 '신분'은 삼성그룹 전체를 멈추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장이 구속 수감됐을 때는 물론 가석방과 사면이 이뤄진 현 시점에서도 이 회장의 부재 가능성은 말 그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건은 현재 1심 재판 중인데 아직 증인신문 절차에 머물러 있다. 올해 안에 결론이 난다고 하더라도 2심과 3심을 거쳐 최종 확정판결이 언제 날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거기에 옛 삼성물산 주주들의 민사 소송과 엘리엇 외에도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탈 등 해외에서의 법적 다툼도 진행 중이다.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하만 이후 대규모 인수합병(M&A)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에 삼성전자는 곧 대규모 M&A를 하겠다고 응대했지만 이 회장의 현재 보폭을 감안하면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군다나 이재용 회장이 부재하게 될 경우 그룹과 삼성전자를 이끌만한 경영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지난 8년간 인재 육성에도 사실상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자의든 타의든 조금 저렴하고 손 쉽게 그룹 경영권을 가져오려 했던 이재용 회장의 선택은 본인이 주창한 '뉴삼성'은 물론 아버지의 '신경영' 선언마저 퇴색시켜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삼성이 그렇지 못하게 된 책임에서만큼은 이 회장도 마냥 자유롭기는 어려워 보인다.
입력 2023.06.26 07:00
Invest Column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3년 06월 23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