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발생시 잘잘못 가리기 힘들어
허술한 계약 내용마저 못지키는 시행사
로펌 대행 후 계약서 수천장으로 늘기도
-
착공 이후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주·신탁사가 시행사를 배제하고 로펌에 시행 업무를 맡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시행사가 작성한 기존 계약서는 허술한데, 부동산 경기가 꺾이며 이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시행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로펌은 계약서를 새로 작성해 이슈별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는 작업에 나섰다.
최근 L건설의 한 사업장에서 기존 시행사가 배제됐다. 시행사가 돈을 빼돌리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시행사의 빈자리를 로펌이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가 꿰차 시행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
H증권은 대주단으로 참여한 한 사업장에서 시행사가 계약 내용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며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H증권은 시행사를 배제하고 소송 관련 자문을 한 로펌에 시행 대행 업무를 맡길지 내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행사의 자리에 로펌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엉망'으로 작성된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 추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이슈에 관해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로펌은 투자자와 ▲시공사의 분양 방식 ▲투자 수익 배분 방식 ▲추가 비용 발생 시 주체별 부담 방식 등을 미리 정해놓는다. 이 과정을 거치며 계약서 장수가 기존 한 자릿수에서 천 자릿수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그동안 시행사의 계약서는 '믿음'의 영역이었다. 실제로 "당사자는 계약의 내용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이행해야 한다"와 같이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문구로 계약서를 작성하곤 했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계약서 내용이야 어찌 됐든 PF 참여자 모두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부동산 침체가 본격화하며 잡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돈을 잃을 수도 있게 됐다. 시행사의 부실은 물론 건설사의 줄도산, 대주단의 PF 자금 회수 여부 등 각 참여자는 생존을 걱정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이에 일부 시행사들은 '신의성실의 원칙'마저 지키지 못하고 있다. 시행사가 저금리 시기에 벌여놓은 사업이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시 금리를 기준으로 계약가를 확정했지만, 이후 예측하지 못한 금리 인상에 사업성이 떨어졌다. 일부는 시행이익을 담보로 새로운 사업장에 투자하며 손실을 키우기도 했다.
한 PF 담당 변호사는 "그동안 시행사를 도와서 계약서를 작성해 준 경우는 있지만, 시행사를 배제하고 로펌이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이례적이다"며 "알음알음 이뤄지던 PF 시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