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수익률 부진에 외면…우리나라도 열기 주춤
기업들 ESG 비용에 부담…정부 정책 지원도 애매
ESG 명분 유효…"韓은 반ESG 토대도 없다"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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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코피 아난 전 UN 사무총장은 2005년부터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적극 주창했다. 이 철학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에야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본격 주목받았는데, ‘ESG 광풍’ 시대를 이끈 것은 세계 최대 투자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다. 그는 2018년부터 투자기업의 CEO에 ESG를 강조하는 연례서한을 보냈고, 2020년엔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엔 투자하지 않겠다며 시장의 변화를 촉구했다.
래리 핑크 회장은 올해 연례 서한에는 ESG 단어를 담지 않았다. 기후와 관련한 언급도 최소화했다. 그는 지난달 한 행사에서 ESG가 극좌와 극우에 의해 완전히 무기화됐으며, 더 이상 ESG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에선 2020년부터 에너지·무기 관련 기업을 등에 업은 공화당 중심으로 반(反) ESG 기류가 형성됐다. 반면 진보 진영에선 투자사들의 ESG 성과가 미진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반 ESG 바람의 원인은 수익성 하락이다. ESG는 지난 수년간 필수불가결한 덕목으로 자리잡았지만 미국 ESG 펀드의 수익률은 시장 벤치마크를 밑돌았다. 공화당이 우세한 주에선 작년부터 ESG 펀드 출자금을 회수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 블랙스톤, KKR 등 글로벌 투자사들은 ESG에 대한 제약이 투자 및 자금 조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SG 열풍은 한 두해 시차를 두고 우리나라에 불기 시작했다. 팬데믹 유동성과 만나 파급력이 폭발했다. 모든 기업, 투자사, 자문사들이 ESG를 최우선시 했는데 지금은 열기가 다소 식은 모습이다. 미국처럼 정치 쟁점화 문제라기보다는 기업들이 ESG에 집중하기 어려워진 영향이 컸다. 작년부터 시장의 유동성이 줄고 기업들의 살림 고민이 커지며 ESG 화두가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대형 금융사들은 각종 ESG 평가 분야에서 ‘최초’ ‘최대’ 등을 강조하는데 그 실체엔 의문이 적지 않다. 국제회계기준원(IFRS)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순차적으로 ESG 의무공시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 2025년까지 이에 따른 공시 준비를 마쳐야 하는 대형 금융지주는 계속 ESG를 강조하지만, 일반 금융사는 관심이 한풀 꺾였다. ESG는 자금 조달부터 투자까지 까다로운 내용이 많다 보니,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모펀드(PEF)도 상황은 비슷하다. 2021년 팬데믹 유동성이 폭발했을 때는 너도나도 자문사의 도움을 받아 ESG 경영 기반을 마련했지만 이제는 그런 움직임이 뜸해졌다. 출자자(LP)들도 ESG를 중시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투자 성과다. ESG에 충실하면 수익률도 좋아진다는 명제는 힘이 많이 빠졌다. PEF들은 일찌감치 ESG 바람에 편승했고, 다시 주춤해진 ESG 시장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다.
한 대형 PEF 임원은 “PEF는 상업적 조직이기 때문에 변화 대응이 빠른데, 속도가 느린 곳들은 지금에서야 ESG를 강조하고 있다”며 “작년부터 반대 기류까진 아니라도 ESG가 허상이라는 분위기는 확실히 있는 것 같고, 일반 금융사 사이에선 ESG 투자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고 말했다.
2018년 한국거래소에 발행 등록된 사회책임투자채권(SRI Bond, 녹색·사회적·지속가능·지속가능연계) 종목은 한국남부발전의 녹색채권(1000억원) 1건에 불과했다. 2019년 132종목(18조7326억원), 2020년 237종목(36조6800억원)에 이어 2021년 549종목(72조7428억원)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그러나 작년엔 536종목(54조3991억원)으로 줄었다. 올해 상반기는 328종목(39조1846억원)인데 절반이 주택금융공사의 사회적채권(MBS)이라 상승 반전에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ESG 채권 투자 수요가 줄었고, 이를 담은 운용사들도 수익률과 운용역 관리에 애를 먹는 분위기다.
기업들이 움직이게 하려면 ESG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부 차원의 독려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도 아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5월 RE100(사용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에서 충당) 대신 CF100(재생에너지에 원전, 수소 등 추가)을 꺼내 들었다. 재생에너지는 부족하고 원전은 많은 한국 현실을 감안한 것인데, 실제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안은 CF100이 아니라 RE100이다. 정부의 방향성이 선명하지 않은 터라, 기업과 시장도 적극 화답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증권사 임원은 “기업에 있어 ESG 경영은 당장의 비용 부담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공공성을 부여해 주도해야 한다”며 “정부가 세계 주류인 RE100보다 CF100에 집중하는 등 애매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시장에서도 ESG는 안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ESG가 과거의 유물이 된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달성해야 할 가치라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럽은 ESG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고, 미국 역시 ESG를 중시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 우리나라도 실효성을 떠나 ESG 자체는 중시하는 분위기가 많다.
우리나라에선 ESG에 집중할 토양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ESG가 여전히 마케팅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평가 방법에 대한 전문성이나 신뢰도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국내 평가 기관들이 수많은 기업을 평가하기엔 역량과 인력이 넉넉치 않다. 역설적이게도 ESG 실행 기반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 ESG 정서가 발현될 상황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지난달 EY한영이 실시한 ‘2023 EY한영 회계감사의 미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회계·재무·감사 종사자 중 70%는 ESG 및 비재무적 정보공개가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31%는 ESG 보고의 유용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정보 신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 및 인증의 부족’을 지적했다.
한 기관투자가 투자책임자는 “국내에선 ESG 평가 방법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기관들도 ESG를 투자로 연결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며 “한국에선 아직 ESG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처럼 반(反)ESG 목소리가 나올 상황도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