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투자사 CB로 시선…무이자·만기 5~6% 조건
이익체력·지배력 튼튼한 상장사…발행 설득 사례도
비상장사 부정 전망에 '회수 부담' 덜한 투자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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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상장사 전환사채(CB)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회수 가능성'이 큰 투자처를 찾아 시중 유동성이 몰리고 있다는 평가다. 고금리를 우회하고 싶은 상장 발행사나 회수 부담을 최소화하고 싶은 기관투자자 이해가 맞물려 메자닌 호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환사채(CB)나 교환사채(EB) 등 주식관련사채 권리 행사 금액은 1조5163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하반기 대비 43.3% 증가한 수치다. 전체 행사 건수 2547건 중 70%에 달하는 1774건이 CB의 주식 전환이었다. 상반기 주식 시장이 강세를 보이며 채권을 주식으로 받아 간 투자자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자연스럽게 발행사나 기관투자자 모두 CB로 눈을 돌리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2차전지나 반도체 등 성장 산업 밸류체인 내에선 주가 고평가 우려에도 실적 성장이 확실시되는 기업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증시만 받쳐준다면 이들 기업 주가의 미래 가치를 담보로 자금을 대겠다는 사례가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최근 4400억원 규모 사모 CB를 발행한 에코프로비엠이 가장 상징적 사례로 통한다. 중량급 펀드를 보유한 사모펀드(PEF) 운용사와 증권사 자금이 몰렸다. 작년 이후 주가가 계속 오름세를 보였지만 표면이자율 0%, 만기이자율 2%(YTM) 조건으로 CB를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직전 500억원 사모 CB 발행에 성공한 엔켐 역시 비슷한 사례로 통한다. 지난해 무이자 메자닌 발행을 추진하다 증시가 부침을 보이며 투자자 이탈로 이어졌지만 이번 CB 발행에선 무난하게 조달을 마쳤다. 표면이자율은 0%, 만기이자율은 5%(YTM)로 설정됐다.
한 기관투자가는 "이자율 0% CB라도 YTM 5~6% 조건으로 최저수익률 조건만 갖춰준다면 기관 수요를 확보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라며 "대부분 미래 주가가 오를 것이라 보고 주식으로 돌려받는 조건으로 이자 없이 자금을 공급하는 구조라, 적합한 발행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부합하는 조건은 ▲실적 성장세가 뚜렷하고 ▲지배력 희석 우려가 없는 ▲상장기업 정도로 좁혀진다. PEF 사이에선 공모채 등 방식으로 조달하는 데 무리가 없는 기업을 찾아가 CB 발행을 권유하는 사례도 전해진다. 시중금리가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도 이자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부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에코프로비엠처럼 투자 수요가 높은 경우 만기이자율을 기준금리 이하로 낮추는 것도 가능하다.
투자 업계 한 관계자는 "2차전지 업종의 경우 진입 가격이 부담스러운 면도 있어 일부러 코스닥 시장 내 주목도는 낮지만 내실 있는 기업을 찾는 경우도 많다"라며 "PEF 입장에선 달리 IPO 허들을 넘길 필요도 없고, 별도의 인력 파견 없이 주가 전망만 밝다면 회수 성과를 얼마든지 끌어올릴 수 있는 투자처인 탓"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 같은 추세가 비상장 기업 투자 회수에 대한 부정적 전망과 무관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크다. 기업공개(IPO) 시장이 최근 단기과열 흐름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상장예심이나 증권신고서 심사 등 문턱은 여전히 높은 까닭이다.
실제로 상반기 공모주 시장이 나쁘지 않은 성과를 보였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증시 입성 문턱이 낮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올 들어 상장을 마친 발행사 대부분은 고성장 산업에서 지위를 구축했거나 꾸준한 이익을 내는 편에 속한다. 사실상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상장을 통한 조달이 가능했던 곳이란 얘기다.
출자 시장 한 관계자는 "일종의 착시효과인 셈인데, 대체로 직전 투자 유치 과정에서 무리한 몸값을 약속하지 않았던 기업들이 공모가 눈높이를 낮춰 입성한 케이스"라며 "추가 투자 유치가 필요한 비상장사가 훨씬 많지만 이들 대부분이 회수 요건을 충족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 기관투자자들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상장사 CB 투자의 경우 이미 IPO 허들을 넘긴 기업들의 신주를 싸게 사들이는 격인 셈인만큼 투자 부담이 훨씬 덜하나는 분석이다.. 시중에 풀린 유동성으로 IPO 시장이 활황을 보일 때만 해도 너도 나도 비상장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며 PE와 VC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말이 오갔다. 그러나 현재 VC는 투자 집행을 크게 줄였고 PE는 기존 상장사에서 투자 기회를 찾는 추세다.
올해 들어 출자자(LP) 전반이 상장 전 투자유치(프리 IPO)에 들어간 대기업 계열사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의 보장수익률을 요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SK온이나 KT클라우드 등도 사실상 모회사가 7%대 이상 내부수익률(IRR)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투자자를 유치했다. 성장 산업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춘 대기업 계열사라 해도 IPO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으로 풀이된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 계열이 아닌 비상장 스타트업의 경우 두자릿수 보장수익률에 이중, 삼중으로 회수 보장 요건을 내걸고 투자 유치에 나섰다가 실패하는 사례도 있었다"라며 "올 하반기 이후 상장사 CB처럼 회수 부담이 없는 투자처를 향하는 자금이 늘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