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금리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저렴한 자금 조달처 부상
자회사가 성장산업에서 사업 영위할 경우 투자수요도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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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자금조달의 화두로 'EB(교환사채)'가 떠오르고 있다. 고금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자회사 주식 등을 담보로 교환사채를 발행해 조달 비용을 아끼려는 움직임이 이어질 전망이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채권과 주식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는 메자닌에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된다. 전 세계적 금리인상 기조가 마무리될 것으로 관측되며 낮아지는 채권수익률을 주가상승률로 상쇄하려는 포석이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시중금리가 높아지며 공모채 발행이 여의치 않은 상황도 한 몫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25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SK에코플랜트는 친환경 자회사 주식을 담보로 3000억원 규모의 EB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EB 교환 대상은 폐기물 관련 7개 자회사를 통합해 설립한 대원그린에너지 주식이다. 발행사가 만기 연장을 결정할 수 있는 영구 EB 형태로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돼 자본확충 효과가 있다. 메리츠증권이 전액 인수하는 구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초 SK에코플랜트는 이번 투자유치로 기존 재무적투자자(FI)의 반발을 샀는데 이를 최대한 누그러뜨리면서도 시장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묘수'를 짜낸 것으로 해석된다. 기존 FI들의 지분을 희석시키지 않는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유치하면서도 자본을 확충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 셈이다. SK에코플랜트는 기존 FI의 투자금 회수를 위해 자회사 상장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LG화학도 최근 LG에너지솔루션의 주식을 담보로 약 2조6000억원 규모(20억 달러)의 EB를 발행키로 하며 자금조달의 급한 불을 껐다. 매년 4조원 이상의 설비투자를 지속해야 하는 상황에서 석유화학 부문 업황 부진이 예상보다 장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소재 등 신사업 부문에 자금 투입을 이어가려면 재원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이에 LG화학은 여수 NCC 공장 매각, 비주력 사업 정리 등을 함께 진행 중이다.
LG화학은 LG엔솔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자금이 2조원에 달하는 지분이 유통주식으로 풀리면 시장의 혼란이 불가피할 것에란 우려가 나오면서 EB 발행안으로 선회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최근 기업들이 보유 중인 자회사 주식을 기반으로 EB 발행에 나서고 있는 까닭은 시중금리 상승이 배경으로 분석된다. 공모채 금리가 이전 대비 크게 비싸거나, 발행 자체가 여의치 않은 경우도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자회사 혹은 자사주 매각으로 인한 유통 주식 수 증가는 시장의 악재로 반영되는 상황이다. 이렇다보나 저렴하게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대안으로 메자닌, 그 중에서도 기존 발행 주식을 활용할 수 있는 EB가 떠올랐단 분석이다.
실제로 LG화학이 LG엔솔 주식을 담보로 발행한 EB의 표면이자율 및 만기이자율은 1.6%로 국내 기준금리(3.5%)를 크게 하회했다. LG화학은 올해 1월 회사채 시장에서 3.7~3.8% 수준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
투자자들의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진다. 시중 투자자금은 상장사 메자닌에 쏠리고 있다. 메자닌은 주식형 채권으로 원리금은 보장되면서도 주가 측면에서 업사이드(성장여력)를 기대할 수 있다. 금리인상 사이클이 마무리돼 채권금리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래 주식 가치 상승으로 이를 상쇄하려는 투자수요가 메자닌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B는 대표적인 메자닌 상품 중 하나다.
대기업들이 2차전지, 친환경 등 산업 성장이 확실시되는 자회사 주식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했다는 점도 투자자들의 호응을 이끄는 점이다. 현재 시장에선 성장 산업 밸류체인 내에서 실적 성장이 점쳐지는 기업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적지 않다. 기대수익률을 만족하는 바이아웃 거래가 마땅치 않은 상황인 만큼 사모펀드(PEF) 운용사 사이에서 재무건전성 우려가 없는 기업을 찾아 CB(전환사채, 주식형 채권) 발행을 권유하는 사례까지 관찰되고 있다.
최근엔 SK하이닉스가 자사주를 활용한 2조원대 외화 EB발행을 추진하면서 시장의 눈길을 끌었다. 자회사의 주식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는 대부분의 사례와 달리 보유한 자사주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신주를 발행하진 않았지만 오랜 기간 가지고 있던 자사주를 쓰면서 사실상 CB를 발행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자사주 활용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단 목소리다.
하반기에도 EB가 계속 자금조달 통로로 활용될 지가 관심이다. 자회사 주식을 매각하거나 신규 유상증자를 하게 될 경우 시장의 반발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EB발행이 저렴한 자금 조달처로 부상하는 양상이다. 특히 미래 성장사업을 영위 중인 회사의 주식이 투자 수요를 끌어모으면서 유망한 자회사를 둔 대기업 계열사는 곳간이 든든할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 이후 EB발행을 추진하는 기업이 눈에 띄게 늘었다. 확실히 많은 곳에서 검토 중인 것 같다"라며 "PEF의 경우 바이아웃 거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매물들이 많다 보니 업사이드 있는 상장사 주식을 저렴하게 사서 투자하고 싶은 수요가 많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