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까지 주춤했던 계열사들 투자·회수 행보 본격화
각종 성과 나오지만 기대에 못미치거나 늦어진 것들도
잠재 위기 불씨는 여전…활용 카드 없는 경영진은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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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SK그룹 계열사들은 수년 내 가장 조심스런 행보를 보였다. 작년부터 본격적인 금리 상승기에 접어들며 재무 관리에 애를 먹었다. 투자와 회수, 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가 헐거워졌고 그룹 전반에 위기감이 확산했다. 전방위로 적극 펼친 자본 조달 활동이 독으로 돌아왔다.
SK그룹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완전히 걷히진 않았지만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반기에 접어들고 연말이 가까워지며 계열사들의 행보는 빨라지고 있다. 위기를 거치며 전략 수행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에 올해 남은 기간 이를 최대한 만회하고 성과를 부각해야 하는 상황이다.
SK그룹은 6월 확대경영회의, 8월 이천 포럼, 10월 CEO 세미나 등 대규모 행사를 진행한다. 이 자리에서 현안과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데, 주요 경영진의 성적표를 확인할 기회기도 하다. SK그룹이 12월 초 정기인사를 내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다음달까지가 경영진이 성과를 부각시킬 마지노선이다. 올해 대규모 쇄신인사가 벌어진다면 다음 기수 경영진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호재가 있으면 3분기로 모는 것이 고과에 유리할 것이란 평가도 있었다. SK그룹은 원래 대외 소통에 적극적이지만 최근에도 주요 계열사들이 앞다퉈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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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황 부진에 허덕이던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발 HBM(고대역폭메모리) 호재로 분위기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 개발 제품을 공개하고, 고객들에 주력 제품 공급하기 시작하는 등 열심히 노를 젓고 있다. 그룹의 다른 축인 SK온은 국내 제3공장 증설과 캐나다 양극재 공장 건립, SK에코플랜트는 국내 첫 이차전지 리사이클링 공장 설립 계획을 밝혔다.
SK스퀘어는 투자 지분을 매각했고 2000억원 규모 자사주도 사들이기로 했다. SK㈜는 쏘카 지분을 롯데렌탈에 팔고, SK텔레콤은 미국 AI기업에 1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SKC는 중국의 반도체 기초소재사업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룹 전반의 투자·회수 움직임이 점차 살아나는 분위기다.
한 M&A 자문사 관계자는 “상반기는 재무부담에 많은 계열사가 지갑을 닫았지만 하반기 들어서는 미뤄둔 것을 조금씩 처리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런 일련의 성과가 얼마만큼의 ‘점수’로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경기 부진 속에 실적 성장세는 둔화했고, 주요 평가 지표인 주가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예상보다 크기가 작거나 시기가 늦춰진 성과들도 있다. 위기론의 크기가 줄었을 뿐 유동성의 호황기에 세웠던 장기 전략은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SK이노베이션은 6월 유상증자 계획 발표 후 주가가 내리막이다. 은행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 모두 여의치 않다 보니 결국 주주에 손을 벌린 것인데 시장의 반응은 좋지 않다. SK㈜가 각종 자산을 매각해 증자금을 마련하는 등 책임감을 보였지만 큰 효과는 없는 상황이다. 자회사 SK온은 잇따라 대규모 자금을 유치하고 설비 투자의 고삐를 죄지만, 작년 투자유치 적기를 놓치며 계획이 모두 뒤로 밀렸다. 배터리 판가 부진에 올해 실적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예상도 나온다.
2차전지·반도체·친환경 소재 사업을 가속화하는 SKC도 꾸준히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비주력 자산을 계속 매각해 대응하고 있지만, 자금이 급한 쪽은 SKC라 원하는 가격을 고집하긴 어려울 것이란 평가다. SK에코플랜트는 폐기물 고도화-에너지 사업-폐배터리 활용 등 전략을 착실히 밟고 있다. 회사는 필요 자금을 계획에 맞춰 조달하고 있다는 입장인데, 최근 자본시장 분위기를 감안하면 빠듯한 살림이 이어질 것이란 시선도 있다.
SK스퀘어는 SK쉴더스 상장 시한에 쫓기다 상반기 매각 성과를 거뒀지만 11번가, 웨이브 등 재무적투자자(FI)를 들인 기업들의 처리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자사주 취득은 이미 상반기에도 꺼냈던 카드다. 주가는 최근 3개월 사이 10% 이상 하락하는 등 흐름이 좋지는 않다.
한 증권사 임원은 “주요 계열사들이 자산 매각, 추가 투자 유치, 돌려막기 등 다양한 자본확충 전략을 펴고 있지만 여기서 더 무리하다간 과거의 사례처럼 그룹 전체가 휘청일 수도 있다”며 “연말 인사 전 CEO 세미나가 있을텐데 활용할 카드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 계열사 경영진들도 답답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