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 '수순' 은근히 바라는 경쟁사…'밑빠진 독 물 붓기'
다자구도 청산시 D램처럼 수익성 중심 경영 가능 기대
中 YMTC 견제한 美·라피다 놓친 日 이해관계가 변수
시장 논리 명쾌해도 반도체는 '국제정치'…전망 불가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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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드 산업 구조조정을 코앞에 두고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WD)의 합병 추진은 시장 논리로 보면 퇴출을 늦추기 위한 생존 전략이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끝날 거란 전망이 많다.
그러나 반도체를 국제정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미국과 일본 정부 입장을 감안하면 결과를 종잡기 어렵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정치 논리가 낸드 시장 과점화 길목을 가리고 선 형국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일본 미즈호, 미쓰이스미모토, 미쓰비시UFJ 은행과 일본정책투자은행은 키옥시아에 기존 융자 차환 및 웨스턴디지털과의 합병에 필요한 자금 1조9000억엔(원화 약 17조15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확약했다. 키옥시아는 기존 출자자인 SK하이닉스의 동의를 구해 키옥시아 주도로 웨스턴디지털과 합병을 추진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 모두 작년 연말부터 투자를 줄이고 웨이퍼 투입량을 낮추는 등 가동률 조정까지 들어갔지만 적자는 지속 중이다. D램을 보유한 경쟁사와 달리 기댈 만한 캐시카우가 없어 내년 투자도 불투명하다. 두 해 연속 투자를 늦추면 다음 업황 주기에서 경쟁사를 따라잡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양사 곳간 사정을 감안하면 합병은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투자자인 SK하이닉스는 물론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양사를 중심으로 낸드 산업 구조조정이 이뤄지길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로 전해진다.
과거 D램 시장 구조조정 전례가 있다. 지난 2012년 일본 엘피다가 파산한 뒤 D램 시장이 과점화하자 생존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는 수익성 중심 경영이 가능해졌다. 치킨게임을 끝낸 1위 삼성전자의 보폭에 맞춰 전체 공급량과 평균판매단가(ASP)를 관리하며 30~50% 수준 영업이익을 꾸준히 남길 수 있었다. D램의 넉넉한 마진은 이후 3사 낸드 경쟁 밑천으로 자리 잡았다.
마침 D램은 DDR5 전환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개화로 공급 제한과 수요 개선 등 선순환 구조에 들어서고 있다. 낸드 적자가 예상보다 길어져도 3사는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D램 수익성을 회복한 3사가 재차 낸드 적층 경쟁을 벌이며 점유율을 늘려가면 D램 없는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은 숨이 턱에 차는 형국이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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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원가 경쟁력에서 10~20%가량 앞서는 걸 제외하면 낸드 기술 격차는 무의미한 수준으로 좁혀졌고 남은 변수는 비용 구조뿐"이라며 "키옥시아는 합병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비용 구조를 개선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투자를 못하고 있는 만큼 차세대 공정 기술 확보 여부가 불투명하다. 합병이 기존 점유율 단순 합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올 들어 반도체 부문 투자비를 10%가량 줄였지만 여전히 30조원에 가까운 투자를 이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비 구매를 늦췄을 뿐 신규 팹(FAB) 부지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부지 확보나 클린룸 건설 등 인프라 투자를 쉰 경쟁사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도 낸드 업황이 개선되었을 때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음 사이클에선 1위 삼성전자만 시장 지배력이 더 높아진다는 얘기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다음 사이클에서 영업 레버리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투자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메모리 매출액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 내다보고 일찌감치 고정비 부담을 짊어지는 식이다. 경쟁사 퇴출 가능성을 고려했거나, 이를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란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낸드 다자구도를 청산해 낸드에서 이익을 남기면 과거 D램 시장 재편과 마찬가지로 SK하이닉스나 마이크론도 수혜를 나눠가질 수 있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메모리는 시장 수요 예측을 기반으로 미리 증설하고 시가로 파는 성격이 짙어서 공급사가 많은 것 자체가 리스크 요인"이라며 "시장 논리로 보면 사업 지속 가능성이 떨어지는 키옥시아나 웨스턴디지털 중 한 곳이 퇴출되는 식으로 구조조정 요건이 마련됐단 목소리가 이미 작년부터 많았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정부가 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 부활을 위해 맞손을 잡고 있어 결과를 장담하긴 어렵다.
지난 수년 낸드 시장의 큰 변화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인수와 미국 상무부의 중국 YMTC 수출통제 명단 추가 정도가 꼽힌다. 하나가 인수합병(M&A)으로 인한 수평통합이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 정부가 총대를 메고 중국 반도체 산업을 견제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대중국 수출 규제에 적극 동참하며 사실상 미국과 한배를 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양국 정부가 중국을 견제한 과실을 타국 경쟁사만 나눠먹는 구도를 용인하기 어려울 거란 분석이 나온다. 현재 일본 금융권이 키옥시아 중심 합병 재추진을 지원하고 나선 것도 양국의 이런 정치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을 거란 시각이 많다. 키옥시아는 일본 내 마지막 메모리 공급사인데, 미국 역시 웨스턴디지털이 없으면 마이크론만 남게 된다. 일본은 과거 엘피다 지원을 머뭇거리다 마지막 D램 공급사를 마이크론에 내준 전력도 있다.
투자 업계 한 관계자는 "엔저 기반으로 양사가 합병한 뒤 기업공개(IPO)에 나서면 어느 정도 재무 레버리지를 일으켜 경쟁을 이어갈 수 있을 거란 복안 등이 거론되는데, 이 역시 가능성은 아직 반반"이라며 "그러나 과연 미국과 일본 정부가 이 둘을 포기하기 쉽지 않을 거란 분석이 많아 결과를 전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