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 미만은 파는 쪽, 6조 이상은 사는 쪽에 배임 우려
영구채 전환 후에도 주가 유지…예가 높이면 거래 무산
정부 판단도 변수…과거 우리은행 민영화 예가 논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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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 매각 본입찰이 다가오며 매도자와 인수후보들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매도자는 투자금 회수와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고, 인수후보는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희망가격을 가능한 낮춰야 한다. HMM 매각의 향방을 가를 예정가격이 어떻게 결정될 것인지 시장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8일 HMM 인수후보자들의 실사 작업이 마무리됐다. 인수후보들은 실사 결과를 바탕으로 금융사들과 막판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HMM 매각 본입찰은 오는 23일 치러질 예정이다.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가 갖고 있는 HMM 구주와 올해 영구채 주식 변환 물량이 매각 대상이다. 총 4억주가량으로 합산 지분율은 약 57.9%에 이른다. 산업은행 주도의 거래인만큼 국가계약법에 따라 예정가격을 미리 산정해둬야 한다. 자금 회수 거래인 만큼 예정가격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예정가격 산정 시 고려할 요소는 여러가지다. 통상적인 가치산정 결과, 회수 자금 원본, 정부와 매도자의 의지, 시장에서 거론되는 금액 등이다. 매각 자문사는 유사 거래 사례 비교, 회계법인은 현금할인법(DCF) 등으로 판단 근거를 마련한다. 거래가 진행될수록 변수들이 반영되며 예정가격이 구체화하고, 매도자와 인수자의 시각도 점점 좁혀진다. 예정가격 관련 내용은 극히 일부 인사만 공유하다가 본입찰 직전 최종 금액을 결정하게 된다.
SM그룹은 일찌감치 HMM 인수의향을 드러내며 인수가격으로 4조5000억원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HMM 영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은 금액이었고, SM그룹은 매각 절차가 본격화하기 전에 발을 뺐다. 거래 조건이 다르고 SM그룹이 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있었는지도 불투명하다. 어찌됐든 4조5000억원은 절대 깨져서는 안될 바닥이란 인식이 생겼다.
과거 산업은행 관련 자문을 맡았던 M&A 업계 관계자는 “투자은행(IB)과 회계법인이 가치 분석 리포트를 제시하면 산업은행은 회수 원금, 수뇌부가 원하는 금액 등을 고려해 비공식적인 조정을 하게 된다”며 “예정가격은 매각 초기부터 검토하기 시작해 점점 관계자들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양상을 띠게 되는데 지금 정도 시점이면 거의 예정가격 윤곽이 정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HMM이 상장사인만큼 시장 가격이 예정가격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HMM 시가 총액은 지난 10일 매각자 측이 영구채를 주식으로 바꾼 물량이 반영되면서 11조원을 넘어섰다. 당초 영구채 부담에 주가가 하락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는데 아직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매각 대상 지분에 대면 6조원을 훌쩍 넘는다.
영구채 주식 전환 발표 당시 HMM 주가는 1만4000원 수준으로 하락했다. 당시 시장이 본 매각 대상 지분의 시가는 5조원 중반대였던 셈이다. 산업 주기를 살피긴 해야 하지만 HMM의 현금흐름이 당분간 부진할 가능성을 감안하면 DCF 방식으로는 높은 기업가치를 매기기 어려울 수 있다. HMM은 지난 10일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이 758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97% 하락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공시했다.
최종 예정금액을 확정할 때까지 매도자와 인수후보 간 눈치싸움은 치열하게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팔아야 할 금액과 쓸 수 있는 금액의 절충점이 어느 지점이냐 하는 문제다.
인수후보들은 HMM 인수에 최대한 적은 돈을 들여야 할 상황이다. 막대한 차입 부담에 꺾이는 업황, 잔여 영구채 지분 등을 감안해야 한다. 내년 잔여 영구채가 주식으로 전환되면 인수자의 지배력은 약화한다. 이 때문에 일부 후보는 5조원 이상은 어렵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자를 의식한 연막 작전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수금융 2조~3조원을 7~8%대 금리로 빌리면 매년 2000억원 안팎의 이자가 발생한다. HMM의 배당으로 이 이자를 갚을 수 있겠지만, 매도자와 맺을 '배당 자제' 약정도 감안해야 한다. 그나마도 HMM의 실적이 잘 유지돼야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산업은행 등은 지금까지 6조8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자와 배당 등으로 일부 회수했지만 대부분은 HMM 지분을 팔아 회수해야 한다. 해운업 호황일 때 매각을 추진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삼는 시선도 있다. 너무 낮은 금액에 팔게 되면 향후 배임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매도자와 관련 부처에선 일찌감치 배임 논란을 피할 마지노선이 어디냐에 대한 고민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예비입찰 때는 독일의 하팍로이드(Hapag-Lloyd)가 9조원을 써냈지만 본입찰적격후보(숏리스트)엔 빠졌다. 실효성 있는 금액으로 보기 어렵다거나, 국내 해운산업 유지를 위해선 당연한 결정이란 평가가 따랐다. 이면에는 9조원을 제시한 곳을 남겨두면 예정가격도 상승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 해운업계 전문가는 “HMM을 너무 싸게 팔면 매각 적기를 놓쳤다는 등 산업은행의 판단을 두고 배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며 “이 때문에 대주주들이 배임 문제가 불거지지 않을 마지노선이 어디냐를 두고 고민했는데 주변에서는 이 기준을 5조2000억원 수준으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기준이 어떻든 산업은행 등은 HMM을 최대한 비싸게 팔아야 한다. 자본비율 관리 등 매각을 해야만 하는 사정도 있지만, 가격이 낮으면 인수자에 대한 특혜 논란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림그룹, 동원그룹, LX그룹 등 인수후보들이 과연 HMM을 사들일 준비가 된 곳이냐는 의문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움직인 LX그룹은 이탈 가능성도 거론된다. 5조원 미만은 매도자가, 6조원 이상은 인수자가 배임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5조원 중반대는 합리적인 수준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예정가격이 있는 거래에서 이기려면 인수후보 기업 ‘오너’의 결단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금융사들은 자금 지원 한도를 최대한으로 설정하고 기업의 입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의 시각도 변수다. 유일의 국적 원양 해운사를 그보다 작은 기업에 맡기는 것이 맞냐는 지적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아예 내년 이후 모든 변수가 사라진 뒤에 다시 매각 절차를 진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 경우 예정가격을 훌쩍 높이면 자연스럽게 인수후보들을 물리고 거래를 종결할 수 있다.
실제 예정가격이 매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다. 지난 2014년 우리은행 소수지분 매각 입찰 당시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싱가포르투자청(GIC) 컨소시엄은 우리은행 지분 10%(콜옵션 행사 시 15%) 인수에 나섰고 주당 1만1000원의 가격을 제시했다. 그러나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예정가격을 주당 1만1050원으로 설정했고 컨소시엄은 50원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정부는 우리은행 지분 약 24%를 팔 예정이었지만 결국 6%만 매각하게 됐고, 우리은행 민영화 시기도 몇 년 늦춰지게 됐다. 매각자는 주관사 등의 도움으로 원매자들의 의향을 어느 정도 점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외국 자본에 주요 은행 지분을 넘기기 싫었던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있었다. 예정가격을 둔 논란이 나오자 공자위는 이후 가격 결정 과정을 더 철저히 기록으로 남겼다.